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
한일합방과 일본의 조선 식민 통치에 관련된 인물을 제외하고, 일본 근현대 인물 중 한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연구된 인물은
아마 이 시데하라 기주로가 아닐까 생각한다.
시데하라 외교, 혹은 대중국 협조 외교 노선이라 불리는 1920년대 후반 일본의 외교 정책 방향성을 확립한 인물이며,
이 인물의 외교 노선은 2.26 사건 이후 군부 주도의 외교 노선과 비교되었고,
외무대신 임기 이후 재야에서 이를 비판하고 분석했으며, 전후에는 총리에 올라 평화헌법의 기초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 중 협조 외교에 대한 것만 보도록 하자.
시데하라 기주로는 중국으로의 제국주의 진출에 대해 굉장히 조심스러운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보았다.
실제로 그간 열강들이 중국에 대한 이권을 더 차지하려다가 견제를 받아 실패한 경우가 많았고,
시데하라의 동서 가토 다카아키가 1차대전 중 21개조 요구안을 제시한 것이 오히려 국제사회의 역풍을 맞았던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데하라가 설정한 대중국정책은 조선과 대만에 대한 문화통치, 융화통치와 비슷한 감이 있었다.
친일파를 육성하고, 중국 내에 일본의 영향력과 자본력을 확대시키는 것.
이 방향성을 감안하다면 하마구치 내각이 들어서고 시데하라가 외무대신에 복귀하기 직전
이 노선에 있어 거대한 장애물이 생겼음을 유추할 수는 있겠다.
관동군의 무책임한 자율성과 황구툰 사건
관동주 관동군 남만주철도주식회사삼국간섭과 아관파천대륙침략론을 채택하고, 청일전쟁으로 이를 실현한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이제 조선병합, 요동 진출, 대만을 기반으로 한 동중국해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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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구툰 사건 이후 장쉐량의 행적에 있어서 애매하고 어중간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적어도 장쉐량이 일본을 좋아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장쭤린을 죽인건 관동군이고,
일본과 협력한 부친에게 그 댓가가 결국 암살이라면 일본을 곱게 볼 이유는 당연히 없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장쉐량이 결과적으로 반일 성향인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우군으로 돌아서는 것에도 이 부분이 주효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시데하라 외교에서 중요한 것은 장쭤린을 대체할 누군가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 더해 장제스에게 혐력하고 있던 중국 내의 자본가들과 영국, 미국의 자본을 견제해야할 필요가 있었기에
당장은 중국 내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할 기반을 늘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따라서 일단 중국이나 국제사회와 협력하여 일본이 중국을 호시탐탐 노린다는 긴장감을 낮추고,
국제사회가 중국에 주목하지 않은 틈을 타, 과거 조선에 대해 했던 것처럼
중국 내 영향력을 급속도로 확대하는 것이 우선이라 본 것이었다.
런던 군축 조약 등도 이러한 방향성에서의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제네바 군축 회담이 그랬듯, 아무리 긴축 경제니 재정 문제니 하더라도 군축을 강요하는 건 당연히 기분이 나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참담한 당시 일본의 국내 상황과 더불어, 일단 국제사회, 특히 워싱턴 회의에서 그렇게나 강경하게 움직였던
영국과 미국과 갈등의 요소가 없어야 만주, 내몽골, 심지어는 중국 대륙 내부로의 진출에 청사진이 그려진다는 것이었다.
개인적인 평가로는 설득력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구체적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당시 중국 내의 정세
즉 반공주의 성향이 강해 중국공산당을 탄압하던 장제스의 행동이나,
당시 중국 내 다른 군벌이 장제스에 등을 돌릴 여지가 있었던 걸 감안하면, 일본에게도 기회가 올 수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외무대신 임기 이후 군부의 광기가 난리를 치던 시절 시데하라는 당시 협조 외교의 문제점으로
구체적이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반성한 적이 있다. 이는 만주사변 이야기에서 다시 하도록 하겠다.
딱 보면 예상이 가능하겠지만, 이는 우군인 장쭤린을 죽이는 것이 일본의 만주 진출에 이득이라고 봤던 초 강경파
관동군과 만철의 입장에서는 개소리나 다름없었다.
일본 내에서도 육해군을 중심으로 시데하라 외교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고,
이는 통수권 우범 문제와 겸쳐 하마구치 내각에 대한 거센 반발로 이어졌다.
그리고
1930년(쇼와5) 11월 14일 하마구치 총리가 습격당했고, 목숨은 건졌지만 내각으로 돌아올 수는 없었다.
내각 서열 상 2인자인 시데하라 기주로가 임시 총리에 올라 임시 내각을 지휘했으나
당시 시데하라는 임시 총리라는 점에서 실권이나 입지가 그리 좋지 못했고,
귀족원과 중의원 내의 입헌정우회 국회의원들(ex하토야마 이치로), 그리고 육해군은 거칠게 시데하라 임시 총리를 비난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잠잠해진 줄 알았던 우가키 군축에 대한 반발, 런던 군축 조약에 대한 반발이 부활했고,
시데하라 기주로는 런던 군축 조약에 대해 '덴노의 비준을 받았다'는 실언을 하고 말았다.
이 문제가 없어 보이는 '덴노의 비준을 받았다'는 문장이 거센 정치적 공격으로 이어진 것이냐면,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단 이 문장으로 인해, 내각이 덴노를 이용해 런던 군축 조약을 체결한 것이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덴노는 실질적 통수권자가 아닌 형식적 비준만을 한 존재로 폄하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건 내각이 덴노의 육해군 통수권을 침해함과 동시에 덴노 위에 군림하려 한 것 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이 이어지며 시데하라 기주로는 '통수권 간범'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썼고,
그렇게 내각은 반대파에 휘둘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꼴을 본 우가키 가즈시게는 점점 현실적인 벽과 시데하라의 무능에 답답함을 느끼게 되었다.
마침 하마구치 총리의 정무 복귀가 가망이 안보이니, 이 참에 자기가 직접 우가키 군축의 수행자로서 총리에 오를 계획을 세우게 된다.
쿠데타는 아니었다. 정치적 저변을 늘리고, 귀족원이나 추밀원과 관계를 확대해서
시데하라 기주로 임시 총리나 와카츠키 레이지로 입헌민정당 대표보다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우가키 군축으로 그 누구보다 우가키 육군대신을 혐오했던 것이 우가키의 우군이 되어줘야 했을 육군이었기에
사실 이마저도 한계가 분명했다.
이렇게 내각이 혼란하니 결국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가 정무에 결국 복귀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하여 정무를 수행할 상태는 아니었고, 결국 얼마 안가 총리직을 사임했다. 사임 후 곧 총상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차기 총리는 결국 와카츠키 레이지로 입헌민정당 대표가 내정되었고, 시데하라는 외무대신직으로 복귀했으며,
우가키는 이전부터 그토록 하고 싶어했던 조선총독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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