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은 혁명의 해라고 불리운다.
시칠리아의 독립선언에서 시작된 자유주의의 열기가 프랑스 2월 혁명으로 폭증했고,
이 열기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나 1830년의 7월 혁명에 비하면 그 규모가 급이 달랐다.
프랑스 밖으로의 확장에는 사실상 실패한 프랑스 혁명, 확장 자체는 성공했으나 전유럽으로 전파되지 못한 7월 혁명과 달리,
1848년의 자유주의 혁명은 유럽대륙을 자유주의로 뒤덮어버렸다.
다만 그 형태는 각기 달랐다. 그리고 어쩌면 그 결과는 이전의 두 혁명의 비하면 초라했다.
프랑스 2월 혁명으로 루이 필리프가 퇴임하며 프랑스의 왕정은 영원히 사라졌다.
그대신 들어선 프랑스 제2공화국은 결과적으로 나폴레옹 3세의 등장과 프랑스 제2제국의 건립으로 변질되었다.
독일의 자유주의 혁명은 완전히 실패했다.
자유주의자들이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했지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방해로 결국 성과없이 해산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자유주의 혁명 역시 메테르니히의 실각만을 이루어냈을 뿐 뚜렷한 성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성과를 보인 곳이라 한다면 이탈리아였다.
1848년 혁명의 시발점인 시칠리아를 시작으로 이탈리아의 자유주의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띄었고,
결국 1870년 이탈리아는 통일되어 이탈리아 왕국이 건설되었다.
로마 멸망 이후 약 천년만에 이탈리아반도가 통일된 것이자 최초의 이탈리아 통일국가가 탄생한 것이었다.
이 중 눈 여겨 볼 곳은 독일이었다.
오토 대제가 서로마 황제의 왕관을 받으며 영광스럽게 탄생한 신성로마제국은 제국보다는 일종의 동군 연합에 가까웠고,
나폴레옹 전쟁 도중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인 프란츠 2세가 영지와 권위 보전을 위해
신성로마제국 황제 직을 포기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선포해버자
나폴레옹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은 해체해버렸다.
이후 나폴레옹에 의해 출범한 라인동맹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폐지 및 개편을 겪었고,
빈 회의의 결과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주도하는 독일연방이 출범했다.
독일연방은 빈 회의로 탄생한 만큼,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으로 자유주의의 물결이 유럽을 덮은 상태에서 이를 완전히 봉쇄하기엔 늦었고,
결국 1848년 독일 3월 혁명으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역시 자유주의자에 대해 일종의 양보를 해야만 했다.
그 결과 1848년 5월 탄생한 것이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였다.
자유시인 프랑크푸르트에 결집한 자유주의자들은 헌법 제정과 공화정 정착 그리고 독일 통일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의 이상주의적인 자유주의자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독일의 다양한 제후국 간의 이해관계였다.
특히 열국들은 이해관계에 맞추어 군사 강국인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줄을 댔고,
그 결과 독일은 프로이센파와 오스트리아파로 나뉜 상태였다.
즉 각자의 이해관계와 각국의 생존을 위해 독일 통일은 신정부를 기반으로 출범할 수 없는 상태였고,
결국 현실주의적 이유로 독일 통일은 프로이센 중심의 통일안과 오스트리아 중심의 통일안으로 논의하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대두한 문제는 민족주의였다.
1772년부터 1795년까지 세 차례에 걸친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한 분할로 인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영토 내에는 체코인, 폴란드인, 슬라브인이 상당수 유입된 상태였다.
그렇다면 이 영토에 대한 포기를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강요할 수 없는 상태에서
'독일인을 위한 국가'로 탄생할 '독일'에 슬라브인을 포함시키는 것이 합당한가에 대한 논쟁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 논쟁은 격화되었고, 결과적으로 모든 민족을 아우르는 독일을 만들자는 '대독일주의 통일안'과
독일 민족만을 위한 독일을 만들자는 '소독일주의 통일안'으로 정리되었다.
그런데 대독일주의를 지지하는 국가는 오스트리아파였고, 소독일주의를 지지하는 국가는 프로이센파였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신성로마제국을 포기한 오스트리아는 아예 통일 독일에 배제시키기도 했다.
결국 프로이센파와 오스트리아파의 정치싸움만이 이어지며 1849년 5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강제해산되었다.
중간 과정은 좀 생략하고 시간을 조금 빠르게 돌려 1861년 빌헬름 1세가 프로이센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 당시 독일은 봉건적 귀족을 기반으로 한 나라였고,
1848년 이후의 자유주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귀족 중심의 정부 체제가 유지된 나라였다.
빌헬름 1세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무시했으며 이탈리아 통일전쟁을 보며 독일의 통일도 전쟁을 거칠 필요가 있다고 느낀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 방법이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이 대륙 저 대륙을 찔러보며 확장주의적 자세를 대놓고 드러내는 중이었고,
오스트리아와는 대독일주의와 소독일주의에서 보듯 독일의 패권을 두고 경쟁 중이었다.
비록 독일에서 3인자의 역할을 하던 바이에른 왕국이 일종의 중립적 자세를 취했다지만
프로이센이 확장주의적 자세를 보이면 바이에른은 분명 혈연을 근거로 오스트리아에 붙을 게 뻔했다.
게다가 외교적으로는 후방의 러시아도 문제였다.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의 손을 들어주며 소독일주의 통일이 좌절된 올뮈츠 협약이 있었기에,
만약 러시아까지 외교적으로 압박해온다면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의 주역이 아닌 오스트리아의 신하로 전락할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독일에는 이를 해결할 인물이 필요했다.
요약하자면 귀족 출신이며 자유주의나 민족주의적 색채가 없으면서,
외교적으로 오스트리아를 압박함과 동시에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만들수 있는 인물.
그리고 전쟁을 준비할 역량이 되며, 이를 통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를 이겨내게 할 인물.
귀족 출신, 크림전쟁에서 러시아를 지지하며 독일의 대러관계 회복에 도움을 준 인물,
1848년 3월 혁명에 대한 강경진압을 주장한 보수주의자, 후방이긴 하지만 어쨌든 군인 출신.
1862년 9월 프로이센 왕국의 총리로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취임했다.
우선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자를 몰래 지원하여 부르주아 중심의 자유주의자들을 견제했다.
그리고 군제를 개편해 전쟁을 준비했으며, 덴마크와의 전쟁으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병합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지역은 역사가 깊은 독일과 덴마크 간의 영토 분쟁 지역이었는데 이때 독일로 병합되어 지금도 독일땅이다.
프로이센의 이러한 확장주의적 통일 노선은 오스트리아와의 마찰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결국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군대가 보헤미아에서 격돌했고(보오전쟁),
쾨니히그레스 전투로 프로이센은 7주 만에 보오전쟁의 승리를 획득해냈다.
보오전쟁의 결과로 오스크리아는 독일 연방에서 탈퇴되었고, 곧 독일 연방은 해체되었으며,
하노버, 나사우, 헤센이 프로이센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그 외 북독일 열국들은 프로이센 중심의 북독일 연방에 가입하게 되었다.
프로이센의 빠른 승리로 전쟁이 끝나자 유럽의 시각은 프로이센으로 향했다.
어쩌면 유럽 중부에 대규모 세력이 새로 태어날 기회라 인식되었고,
이는 특히 확장주의 방향성을 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에게 위기로 파악되었다.
그래서 나폴레옹 3세는 보오전쟁 종전 협상의 중재를 하면서 프로이센이 얻어가는 걸 막지 못하는 대신
오스트리아가 포기해야할 부분을 최소화하는 데에 최선을 다했으며,
이를 넘어 바이에른 왕국을 중심으로 남독일 연방을 구축해 독일을 분단시키려 노력까지 하였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의 갈등이 시작된 것이었다.
프로이센은 이후 프랑스에 대한 수 많은 공작활동을 벌였고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이 발발하자 그 공작의 효과로 프로이센군은 순식간에 독불국경을 통과해냈다.
나폴레옹 1세의 조카(사실 아님)인 나폴레옹 3세는 삼촌처럼 훌륭한 지휘관의 면모를 과시하려 주력군을 이끌고 전장으로 향했으나,
스당에서 포위되었고, 결국 프랑스 주력군은 싸움 한 번 없이 전원 생포되는 굴욕을 맞이했다.
9주만에 보불전쟁의 결과는 프로이센의 승리로 확정되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를 즉각 탄핵, 제3공화국 체제로 개편한 후 프로이센에 항거했으나
이제 보불전쟁에서 남은 건 승자의 특권 뿐이었다.
프로이센군은 파리를 포위했고, 파리에 대한 모든 보급로를 차단한 후 그냥 시간만 보냈다.
어차피 화력과 군세로 프로이센이 질 일은 없었고, 강대국 독일의 탄생을 알릴 겸 그냥 시간만 보냈다.
1871년 1월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
빌헬름 1세는 독일 황제의 왕관을 썼고, 북독일 연맹을 독일 전체로 확장시켜 독일 제국(제2제국)의 탄생을 선언했다.
그 다음 날에 독일은 프랑스와 휴전협정에 합의했고 3월 독일군의 파리 개선 행진과 함께 보불전쟁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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