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리고 이 현상은 어쩌면 인간으로 구성된 모든 것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가정, 모임, 학교, 회사, 정부, 아니면 어쩌면 국가 그 자체가 보유한 특성 아닐까?
위대한 사령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실수는 무엇이었을까?
모스크바로 진격한다는 선택지를 고름에 있어 이 선택지를 그의 앞에 놓이게 한 원인은
프로이센, 스페인, 포르투갈,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는 걸 넘어 영국과 러시아마저도 굴복시키겠다는 욕심이 아니었을까?
1812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철군한 나폴레옹의 군대는 1813년과 1814년을 걸치며 승산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1814년 3월, 프랑스의 여론은 반불동맹이 들어올 파리를 나폴레옹이 입성했던 모스크바처럼 불바다로 만들지 않기 위해
반불동맹과의 협상, 즉 패배를 인정하기를 나폴레옹에게 강요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협상을 받아들였고, 1814년 5월 엘바섬으로 유폐되어 몰락하고 말았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직후 오스트리아 빈의 발하우스플라츠에서 5개국의 대표가 집결했다.
해당 대표들은 '프랑스 혁명 이전의 체제로의 복고'를 목표로 반자유주의-세력 균형을 전제로 한 유럽의 정세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빈 회의에 참석한 5개국이 동맹을 맺어
대영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과 재건된 프랑스 왕국이 세계 정세를 유지하는 빈 체제가 형성되었다.
초반에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는 불상사가 있기는 했지만 빈 체제는 초반에는 나름 잘 돌아갔다.
하지만 메테르니히의 선택은 인간의 끝 없는 욕심과 오스만 튀르크 제국을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오스만 튀르크 제국은 종이 호랑이였다.
메메트 2세나 슐레이만 대제 시대의 영광은 사라진지 오래이고 이제는 유럽국가들의 공격으로 영토를 잃어가는 나라였다.
다르게 말하면 제국주의 확장이 본격화된 유럽 제국의 시선에서는 유럽에서 영토를 넓힐 마지막 땅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는 자유주의 및 낭만주의와 이해관계가 들이맞는 것이었다.
1821년 그리스가 독립을 선언했다.
메테르니히는 자유주의의 확산 방지 및 세계 정세의 안정과 균형을 위해
5개국 동맹에 그리스 독립전쟁에 대해 참전과 지원을 하지 말라고 호소했지만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그리스 독립전쟁을 지원, 심지어는 민간 차원에서 참전하는 데에 이르렀다.
결국 1829년 결국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거의 2000년만에 그리스가 부활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이름이 동로마 제국이 아닌 엘라다(헬라스)인 것은 민족주의적으로 꽤 중요한 반향을 일으켰을 것이 분명하다.
1830년 복고 부르봉 왕조의 두번째 왕인 샤를 10세는 자유주의자를 의회에서 쫒아내려했지만
이러한 노력은 선거에서 왕당파가 대패하며 무의미해졌다.
같은 해 7월, 샤를 10세는 하원을 페지하고 선거 자격에 제한을 가하는 칙령을 공포했고, 결국 7월 혁명이 발발했다.
하필 이 즈음에 프랑스군이 알제리에 원정을 다녀와 혁명을 진압할 여력이 부족했고,
결국 7월 말 샤를 10세는 퇴임 및 오스트리아 망명을 선언했다.
자유주의의 시발점인 프랑스에서 다시 한번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빈 회의로 복고된 프랑스 부르봉 왕가는 다시 한번 무너졌다.
혁명의 파란은 다시 한번 국경을 넘었고, 벨기에 혁명으로 벨기에가 네덜란드로부터 분리독립했다.
하지만 빈 체제는 이러한 자유주의의 재흥을 억제할 여력이 사라진 상태였다.
영국은 영광스러운 고립을 선택하며 자국의 이익에만 집중했고, 러시아는 오스만 튀르크와 페르시아를 노리며 남하에 몰두했다.
결국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둘이서 이를 제압해야했는데,
프랑스에 7월 왕정이 설립되며 완전한 자유주의로의 전환이라 하기도 애매해졌다.
7월 왕정으로 프랑스인의 왕에 오른 것은 루이 필리프였다.
그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방계이자 오를레앙 공작이었지만, 그의 가문은 대대로 자유주의적 성향이 있었고,
심지어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혁명에 가담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애초에 왕정이 프랑스인을 만족시킬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고,
1832년 영국이 선거법을 개정하자 프랑스에서도 토지 기반의 재산권 기준 제한선거권을 개정하자는 여론이 대두되었다.
1848년 2월, 이에 대한 무제한 토론이 개최되려 했으나 무력 소요를 우려하여 결국 무산되었고,
결국 한달도 지나지 않아 2월 혁명이 일어났다.
2월 혁명 등 1848년 초에 발생한 자유주의 혁명은 온 유럽을 덮었고,
결국 1848년 3월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가 실각하면서 빈 체제는 조용히 해산되고 말았다.
빈 체제의 종식은 메테르니히를 '실패한 정치가'라고 해석시킬 여지를 제공한다.
하지만 과연 메테르니히는 실패한 정치가였는가?
물론 빈 체제는 실패했다. 빈 체제로 형성된 동맹은 빈 체제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애초에 저들에게 말을 듣게 할 수단도 없기는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메테르니히를 '성공한 외교관'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해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는 뜻은 아니다.
메테르니히가 빈 체제를 통해 이룩하고자 한 바는 다음과 같다.
1. 구 체제로의 복고 및 자유주의 확산에 대한 탄압
2. 세력 균형과 상호 견제를 기반으로 한 평화 체제
이를 해석하자면 전자는 절대왕정 국가들이 동감하는 일종의 공통 이익이라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막말로 '우리끼리 안싸우면 전쟁은 없다'는 논리를 기반으로 나온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다.
물론 후자를 위와 같은 논리로 해석한다면 틀렸다는 결론이 나오겠지만, 나는 메테르니히가 옳았는지를 따지려는 게 아니다.
메테르니히는 자신의 거점인 빈을 중심으로 국제 질서를 제어하려했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강대국의 공통 이익을 기반으로 각국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일종의 국제기구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공통 이익을 기반으로 한 국제 질서의 제어 및 상호 견제를 통한 이권 조율은 현실주의적 방향성으로 그 공감대가 이어지며
후대에도 메테르니히 스타일 외교는 이어지게 된다.
다만 이것이 '메테르니히즘'이라 불리지 못하는 이유는, 이것을 꽃 피운 정치가는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현실주의적 외교에 대한 공감대는 선술했듯 후대에도 이어졌다.
대표적으로 위의 헨리 키신저가 있다.(키신저는 자주 메테르니히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키신저는 실리를 위해 현실을 고려하여 도덕성이나 이익을 포기할 줄 아는 인물이었는데,
이러한 방식은 강대국에게 명분에 휘둘리지 않고 이익에 집착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자율성을 부여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현실주의적 범주 내에서는 강대국의 행위에 있어 제약이 없어도 됨을 의미할 수 있고,
그렇다면 '현실주의적 범주'라는 개면을 규정하고 해석하는 것도 외교에 있어 중요하다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빈 체제는 이러한 것의 시발점이었다.
그렇다. 현실주의 외교의 다른 말은 패권주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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