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 다카시. 일본의 19대 총리이며 다카하시 고레키요와 함께 다이쇼시대 입헌정우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좋아하는 인물인데, 이유는 간단하다.
原(하라)敬(다카시). 즉 이름이 진짜 쉽다. 이누카이 츠요시처럼 모르는 한자 이름에 들어가는 게 아닌데다가 겨우 두자이다.
참고로 나는 인명을 정말 못 외우는 편이다. 여기에 한자도 지 멋대로라서 헷갈리고 디진다.
책 읽다가 인명 잘못 읽어서 착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하라 다카시는 그럴 필요가 없다.
하라 다카시를 당대의 정치인이나 주요 인물과 비교했을 때 나타나는 가장 특징적인 점은 작위이다.
이 사람은 화족이 아니다. 게다가 대학이 뚜렷히 설치되지 않은 시절에 유년기를 보내 고졸이다.
하급무사가문으로, 이토나 야마가타처럼 사무라이출신이 아닌 사실상 농민 집안 출신이며
언론인과 관료로 활동한 후 정치적으로 성장하여 당대표와 총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관료로 활동하던 당시 근무지는 외무성과 농상무성이었는데, 마침 그럴 때마다 외무대신과 농상무대신이 이노우에 가오루였고
이노우에 가오루에 의해 발탁되어 중앙정치까지 진출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이후 사이온지 긴모치에 의해 입헌정우회 창당멤버가 되었지만 이토와 잦은 마찰을 보였고,
그래서 이토가 죽고나서야 정계 핵심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게이엔시대를 걸치며 여러 국무대신을 역임했고, 문관임용령을 확대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으며,
이후 관료와 비 야마가타파 군인 등이 입헌정우회에 유입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각종 국무대신 및 핵심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중 1918년(다이쇼7) 쌀 소동이 발생했고,
결국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총리대신이 사임했다.
추밀원에서는 사이온지 긴모치 등의 주도로 하라 다카시가 차기 총리로 추대되었고,
그렇게 하라 내각이 출범하게 되었다.
하라 내각의 구성원을 보면 이 내각의 특성을 알 수 있는데,
외무대신 우치다 고사이, 육군대신 다나카 기이치, 해군대신 가토 도모사부로를 제외한 모든 국무대신이
입헌정우회 당원으로 구성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사실상 일본 최초의 정당내각이며, 일본의 정당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점이라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하라 내각은 항상 고난의 연속이었다. 1918년 9월부터 1921년 11월까지 3년여의 시간 동안 별에 별일이 다 터졌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들이 후대에 영향을 주는 중대한 사건들이었다.
단언컨데 다이쇼시대에 하라 내각보다 고생한 내각은 2차 야마모토 내각뿐일 것이다.
근데 그때는 관동대지진이 터졌고, 터진 사건의 규모만 생각하면 하라 내각쪽이 더 크다.
이 사건을 하나하나 서술하기 앞서 정리하는 느낌으로 적어보고자 한다.
우선 1918년 1차대전이 끝났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파리 강화 회의가 개최되었고, 이후 세계정세가 군축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일본에 반서방감정이 고조되었다.
여기에 더해 전쟁이 끝났으니 전후공황도 같이 왔다. 물론 대공황에 비하면 애교수준이었지만 말이다.
여담으로 이때 미국이 금본위제로 전환하면서 금 해금 논의가 처음으로 진행되었다.
다음으로 1919년(다이쇼8) 3.1운동과 5.4운동이 발생했다.
조선과 대만에 대한 통치정책을 전환해야만 했고, 아시아 전역에 반일감정이 고조되었다.
이제는 '구미열강으로부터 대항할 아시아의 희망 일본'이라는 이미지는 사라진 것이었다.
게다가 1920년(다이쇼9) 안휘군벌이 몰락하면서 향후 중국 진출이라는 목표에서도 큰 차질이 발생하고 말았다.
전임자인 데라우치가 저지른 최악의 삽질, 시베리아 원정군 퇴각 문제도 있었다.
물론 철군은 1922년(다이쇼11)이 되어야 겨우 완료된다.
이러는 동안 돈과 외교력에서 얼마나 손해를 봤을지는 말안해도 알 것 같다.
보통선거법에 대한 본격적인 주목이 시작된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요우라 내각과 2차 호헌운동을 언급하는 것이 맞지만,
일단 보통선거법과 소선거구제 도입에 대해 논의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1919년 유존사가 설립된다.
현양사, 흑룡회, 낭인회의 뒤를 잇는 국가주의 단체이고, 이때부터 일본의 국가주의가 본격적으로 표면화된다.
그 유명한 기타 잇키도 이 즈음에 일본으로 귀국했다.
1920년 일본사회주의동맹이 출범했다.
그 유명한 요시노 사쿠조가 활동하는 것도 이 시대이며, 사회주의 무산정당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때이다.
일본노동총동맹도 이 즈음에 결성되었다.
마지막으로 히로히토 친왕의 황태자비를 누구 할 것이냐에 대해 조슈와 사쓰마,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황실 간 갈등이 있었고
이것은 궁중모중대사건으로 이어져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정계에서 은퇴시켰다.
물론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하라 다카시 총리 본인이 암살당하는 결말로 이어졌다.
이러한 것들을 하라 다카시가 해결하려 노력했다던가, 하라 다카시가 해결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전부 다이쇼 후반기, 그리고 전전 쇼와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겠다.
그러니 하나하나 논함에 앞서, 일종의 서론과 같은 느낌으로 하라 내각 시기에 대해 전반적으로 서술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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