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자민당 총재에 이시바 시게루가 당선되었다.
이시바를 다른 정치인들과 비교해봤을 때 눈에 띄는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종교이다.
이시바 시게루는 개신교도이며, 가문 대대로 교회에 다닌다고 한다.
대부분 일본의 정치인이 종교를 무교, 혹은 불교나 신토로 적는 것과 달리 이시바 시게루는 개신교도인 것이다.
그런데 출마 선언은 돗토리현에 있는 신사에서 했다.
일본에서 기독교의 역사는 참 길고 오래되었다.
1539년(덴분12) 풍랑을 만나 표류한 포르투갈 상인이 다네가시마에 상륙하며 유럽에 본격적으로 일본이 소개되었고,
1549년(덴분18) 프란체스코 하비에르가 일본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
같은 해에 일본 최초의 세례자 베르나르도(일본명 불명)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독교 포교 허가는 조총 확보 및 동남아 무역을 통한 이익 확대를 노린 것이었으며,
일부 다이묘들은 기독교 포교 허가나 서양인의 상륙만 허가한 것이 아닌, 아예 기독교로 개종한 경우도 있었다.
이후에 덴쇼 견구 사절이나, 잇코잇키를 견제하는 목적으로 기독교가 묵인되기도 했으나
시대가 안정되고 에도 막부가 세워지며 기독교는 오히려 박해의 대상이 된다.
1622년(겐나8) 에도 막부는 기독교 신자와 선교사 총 55인을 나가사키에서 처형했고,
1637년(간에이14) 기독교들이 박해에 불만을 품어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났다.
같은 해에는 그 원인이 되기도 하는 후미에가 실시되기도 했다.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은 지속적으로 일본과의 교역을 재개하고자 했으나
에도 막부는 사신 61명 전원 처형으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선교의 길은 막혔고 신자는 전부 죽었다. 따라서 일본의 기독교는 전멸했다.
라고 서양인들은 생각했다.
1854년(안세이1) 일본은 결국 개국을 하게 된다.
개국 이후에도 일본인의 기독교 개종은 여전히 금지되었지만, 개항장에서의 선교사나 종교인의 활동은 막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일본의 기독교 포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 서양 선교사들은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선교를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주민의 호응은 떨어졌다.
1865년(겐지2)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한 선교사는 포교를 위해 주민 커뮤니티와 접촉하던 중
우연히 그들의 종교 활동을 목격하고 만다.비록 원시적이고 왜곡되어있어 확신하기는 힘들지만
신앙의 내용, 찬송가, 그리고 그들이 숭배하는 대상까지, 그 모든 것은 분명 기독교의 것이었다.
알고 보니 나가사키 등지에는 기독교도 잔존했으나, 정부의 탄압 등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 있기에 지하로 숨어들었고,
그 결과 알맹이를 제외하면 도저히 기독교라고 판단하기 힘든 형태로 변질된 것이었다.
기독교 선교사에게 소극적이었던 것도, 그대로 숨어서 서양인과 접촉을 꺼린 것도
자신들의 기독교 신앙이 표면에 드러나 정부의 탄압을 받을까 걱정해 그런 것이었다.
이는 기독교에 있어 큰 충격이었다.
사실상 자연발생이나 다름없는 새로운 기독교도의 존재였고, 한편으로는 그들을 유럽 기독교로 동화시킬 방법까지 모색하게 했다.
이를 '신자 발견'이라 하며, 신자 발견 이전까지 일본에 존재했던 기독교를 '가쿠레키리시탄'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일본의 기독교 박해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 박해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진행되었고, 서양의 협박과 외교적인 이유로 인해
일본은 '오방의 게시에 대한 완전 철회'라는 형태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게 되었다.
신자 발견이 이루어진 그 자리에는 성당이 지어지게 되었다.
'우라카미 천주당'이라고 하며 재건되어 나가사키에 지금도 남아있다.
재건되어야 했던 이유는 당연히 원폭피해였다. 그래서 위치도 원래 위치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고 알고 있다.
하필 팻맨이 떨어진 지점이 우라카미 천주당 바로 옆이었고, 지금도 그 잔해가 보존되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