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공산당과 무산정당 2
메이지 일본의 사회주의 3고토쿠 슈스이가 사회당에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내렸음은 점차 사회당이 아나키즘과 극단주의로 선회해갔음을 의미했다.이는 이러한 극단주의 노선을 거부했던 기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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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정당(無産政党)
기독교 사회주의와 각종 노동조합,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들이 혼재하여 탄생한 이 단체의 기본 방향성은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에 있어 과격파인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을 배격하고
현실적인 방법(선거)으로 의회에 진출하여 사회주의적 이상(ex: 노조 합법화)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회주의적 이상이 문제였다.
이 사회주의적 이상을 설정하고 실현해 나감에 있어
1926년(다이쇼15) 3월에 창당된 노동농민당 내에서 다양한 이견이 갈렸다.
특히 자신의 활동에 장애물이 될 여지가 있던 공산주의에 대해 일부 사상적 포용을 보이는 것에 대해 거부하던 사람도 있었고,
현실적인 방법과 의회 참여를 위해 다른 정당이나 유산계급과 손을 잡자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노동농민당 내에 일종의 좌우대립이 발생한 것이었다.
결국 노동농민당은 창당 1년도 되지 않아 분열되었다.

가장 먼저 노동농민당을 탈당한 것은 우파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아베 이소오, 마쓰오카 고마키치, 니시오 스에마츠 등의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고토쿠 대역 사건 이후의 겨울 시대에 초점을 맞춘 것인지 반공주의를 꽤 강조했고,
노동농민당의 창당 과정에서부터 공산주의자의 유입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노동농민당 탈당 후 사회민중당을 창당했고 그곳에서 활동했다.
여담으로 사회민중당 창당멤버에는 요시노 사쿠조도 있었다. 아베 이소오 등과 친분이 있어 그런듯 싶다.

그 다음으로 노동농민당을 탈당한 것은 중도파였다.
중도파는 일본노농당을 창당했고 여기에는 아소 히사시, 아사누마 이네지로, 야마나 요시쓰루 등이 주축이 되었는데,
이들은 1890년대생 30대 중후반의 젊은 인재들이었다.
즉, 이들은 사회주의보다는 사회 운동과 사회 문제에 집중하던 사람들이었기에,
그 해결을 논하고 실현하는 것을 중시했던 경향이 강했다.
사족으로, 여기서 말하는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도쿄 찌르기 사건의 그 인물이다.
그거 언젠간 언급 한 번 할 수 있겠지.
노동농민당에 잔류한 좌파에는 호소사코 가네미츠, 스기야마 겐지로 등이 있었다.
편의상 설명은 생략한다.

덴노가 바뀌고, 보통선거제도가 도입된 후 첫 총선인 16대 중원선이 1928년(다이쇼3) 시행되었다.
결과적으로 입헌정우회와 입헌민정당의 양당구도가 굳어졌지만, 무산정당 역시 얻은 게 없는 건 아니었다.
노동농민당(좌파)에서는 미즈타니 초자부로, 야마모토 센지,
일본노농당(중도)에서는 가와카미 쇼타로,
사회민중당(우파)에서는 아베 이소오, 니시오 스에마츠, 스즈키 분지, 가메이 간이치로
도합 7명의 당원이 당선되어 제국의회에 진출한 것이었다.
즉 비교적 온건하고 현실적인 방안에서의 이상 실현에 필요한 전진은 이룩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 결과는 선거운동 속 수많은 탄압을 딛고 일어난 결과이니
적은 의석수에도 분명 이는 뚜렷한 성과였던 것이다.
선거 직후 무산정당은 힘을 합쳐 내각의 무산정당 탄압(선거간섭)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선거간섭을 주도한 스즈키 기사부로 내무대신에 대한 탄핵안이 제출되었고,
무산정당뿐 아닌 입헌민정당과 귀족원도 스즈키 내무대신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자 결국 스즈키 내무대신은 사임했다.

양당제의 고착화와 무산정당의 원내 진입은 사실 여당과 내각의 입장에서는 그리 좋은 소식만은 아니었다.
따라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점차 무산정당을 탄압해 나갈 방안을 실현해나갔다.
선거 직전인 1928년 3월 15일, 치안유지법을 근거로 2차 공산당 당원을 색출 후 체포했고(3.15 사건),
이로 인해 2차 공산당은 강제 해산 절차를 밟게 되었다.
이러한 체포대상에는 정치인이나 사회운동가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고
교토제국대학 교수 가와카미 하지메, 도쿄제국대학 교수 모리 요시타로와 같은 학자는 물론
그들을 따르고 그들에게서 수학하던 대학생들까지 대거 체포하게 되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2차 공산당의 당원들은 자체적으로 2차 공산당의 중흥을 노렸지만
1년 만인 1929년(쇼와4) 4월 16일 전원 검거되며 이는 무산되었다.(4.16 사건)
이렇게 2차 공산당은 완전한 강제 해산을 당하게 되었다.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이를 넘어 더욱 강한 탄압을 위해 치안유지법 개정안을 제국의회에 제출했다.
내용은 단순했다. '치안유지법의 최고형을 사형으로 한다'
입헌민정당과 무산정당은 이에 거칠게 항의했고, 이에 대한 국회 기조 연설까지 가졌으나,
치안유지법 개정 반대 연설을 준비하던 야마모토 센지 의원이 우익 인사에 의해 암살당하는 등
극우 단체에 의한 위협이 표면화되며 점차 분위기는 찬성쪽으로 전환되었다.
결국 1929년 치안유지법 개정안은 결국 통과가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무산정당들도 힘을 합쳐야한다는 논의가 시작될 수 밖에 없었다.
1928년 非노동농민당계 무산정당인 무산대중당과 일본농민당은 일본노농당과 힘을 합쳤고
그렇게 일본대중당이 창당되었다.
노동농민당도 개편을 거쳤고, 사회민중당 역시 타 정당과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넓히며 정치적 기반을 확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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