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덴노가 덴노에 오른 1926년(쇼와1) 12월부터 2차 와카츠키 내각이 퇴임한 1931년 12월까지
대략 5년 간의 기간은 근대 일본에 있어 가장 급격한 내부 변동이 일어났던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다른 특정 5년을 비교했을 때 비슷한 규모, 혹은 더 큰 규모의 변동이 있었던 해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 쇼와 첫 5년 간의 변동이 중요하다고 본 이유는,
다른 시대의 변동과 달리, 이 시대의 변동은 정치권이 아닌 군부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시대의 변동은 빠르고 은밀하게 사회전반을 잠식해갔다.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자면 1920년대 중후반 발생한 군부의 변화를 살펴봐야 할 것이겠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실각과 함께 육군을 장악하고 귀족들과 유착되었던 야마가타파 육군은 사실상 몰락했다.
그 자리는 야마가타파가 아니었던 청일전쟁, 러일전쟁, 1차대전에 참여했던 새로운 군사 엘리트들이 대체해나갔고,
다르게 말하면 시베리아 철군 이후 전공을 쌓을 수 없게 된 대좌(대령) 미만의 일본군은 이제 승진할 길이 줄어든 것이었다.
이는 구조적 불만으로 확장되었고, 러일전쟁에 참전했던 우가키 가즈시게와 사이토 마코토가 군축을 선택하며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조직화된 저항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대좌 미만의 젊은 장교들에게 있어 활약할 여지는 사실상 첩보활동이 전부였다.
공교롭게도 이 첩보 활동은 육군의 역량을 키우는 데에는 큰 영향을 주었다.
육군의 활동 범위는 점차 군사활동에 한정되지 않고 국제정치, 외교, 반공주의 등으로 확장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육군에는 육군 나름의 정치적 이상론이 형성되어갔다.
이러한 육군의 정치사상의 배경에는 군인칙유가 큰 영향을 끼쳤다.
군인칙유를 일종의 훈시로만 사용한 해군과 달리 육군은 군인칙유의 암송을 의무화했고
(군인칙유를 만든 것이 야마가타 아리토모인 점에서 온 영향도 있음)
그렇게 육군은 군인칙유에 적힌대로, 자신들은 덴노헤이카의 군대로써, 덴노헤이카의 국가 일본의 이익과 함께하고
덴노헤이카의 명예와 이익에 기여하는 존재라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내재했다.
(이러면서 군인칙유에서 군인의 본분으로 강조한 5개조는 잘도 안 지켰네)
이러한 육군의 비군사적 역량 확대와 군국주의적 관점은 점차 에도시대 말의 사무라이들처럼
현실 불만을 해결하기 위한 의견 개진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에도 막부를 세운 근간인 무사들이 그랬듯, 메이지 유신의 영광을 지탱해 온 일본의 군사력은 점차 현실에 대한 불만을 보이며,
메이지 유신과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무너트릴 준비를 해나갔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내면에는 덴노헤이카를 위해 정부를 무너트린다는 국가주의적 반정부주의가 두드러졌다.
쓰다보니 일본의 존황양이 사상과 군국주의는 꽤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역시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다.
존황양이론이 그러했듯, 육군 내에 형성된 국가주의적 성향은 덴노에 대해 명분을 위한 일종의 수단에 가깝게 여겨졌다.
그 배경에는 천황기관설을 국가주의에 결합시킨 기타 잇키가 있었다.
기타 잇키는 덴노에 대해서 헌법 수호를 위한 상징적 역할만을 강조했는데,
이것이 육군의 군국주의에는 덴노에 대한 실질적인 인식으로 수용되었다.
다만 표면적으로는 덴노는 신성한 반인반신이자 국체라고 떠받들었는데,
이는 대외적 명분일뿐 실제로는 덴노가 아닌 자신들, 즉 군인들이 더 중요한 정치적 존재라고 여겼던 셈이었다.
이러한 군국주의적 육군의 적극론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광기의 정도를 비교한 구분일뿐, 사실 양측 모두 광기라는 동일한 궤도 안에 있었다.
과격한 적극 실행론을 주장한 강경파는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덴노헤이카를 명분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덴노헤이카의 명예와 위상에 방해된다 여겨지는 정치인들을 공격적으로 비판했으며,
덴노헤이카를 위해서라면 정권 전복 역시 정당하다 판단해 자체적인 쿠데타를 기획하기도 했다.
이들을 황도파(皇道派)라고 한다.
반면 비교적 유화적인 실행론을 주장한 온건파는,
현 체제를 유지한 채 그 안에서 일부만 수정하고 각종 방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군국주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그래서 이들은 통제된 범위 내에서의 과격한 실행론을 목표로 삼았다.
그들이 바로 통제파(統制派)이다.
황도파의 중심이 되어준 인물에는 아라키 사다오와 마사키 진자부로가 있다.
아라키는 베테랑 장성으로서 황도파 육군의 모범적 존재이자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고,
마사키는 육군대학교에서 장교들을 가르치며 그들의 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교육자였다.
실제로 안도 데루조와 이소베 아사이치 등은 마사키에게 교육받은 장교였다.
그 외에도 만주사변 당시 관동군 사령관이었던 혼조 시게루, 태평양 전쟁에 참전할 야마시타 도모유키 등이 황도파에 속했다.
통제파의 중심에는 나가타 데쓰잔이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활동했던 도조 히데키, 고이소 구니아키 등 역시도 통제파의 구성원이었고,
무토 아키라, 도미나가 교지, 기무라 헤이타로 등 이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참여하는 인물들도 통제파였다.
특히 나가타와 도조의 경우, 황도파의 과격성을 경계해, 황도파에 협조적이지는 않았다.
물론 우가키 가즈시게와 우가키 군축에 대한 반대와 견제처럼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는 경우에는 힘을 합쳤고,
무다구치 렌야나 오하타 도시로처럼 황도파와 통제파 양측 모두 몸을 담았던 인물도 있었다.
여기에 더해 만주사변에 주역들인 이시하라 간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등의 만주파도 있었는데, 이는 설명을 생략한다.
황도파와 통제파는 모두 1930년대 초반까지의 정당정치와 그 결과를 혐오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있어 정당정치는 너무 소극적이었고,
따라서 정당정치는 군부의 시선에서 현실적 장벽으로 간주되었다.
다만 그 정당정치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있어 황도파와 통제파 간 시선 차이는 분명히 존재했다.
통제파는 정당정치인을 군의 통제 하에 두어 군이 국정을 주도하는 계획국가를 구상한 반면,
황도파는 정당정치인을 부패하고 무능한 문민세력으로 보았고 군이 정화해야 할 대상이라 여겼다.
그리고 황도파가 구상한 '정화'에는 무력 충돌이나 유혈 사태까지 포함한 것이었다.
이러한 육군의 급진화에 대해 정당정치인들이 인식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체제와 법치주의를 통해 제어가 가능하다 보았고,
그렇기에 과거 야마가타파와 우호적 관계를 맺기도 한 입헌정우회가 그러했듯,
육군에 친화적인 인사를 통해 육군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2차 와카츠키 내각 이후 입헌정우회가 정권을 잡은 것도, 차기 총리에 원로 정치인인 이누카이 츠요시가 내정된 것도
온건한 육군 제어책으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무장한 군대가 가진 힘의 실체와, 그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쓰일 수도 있는지를 무시한
정치권의 오판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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