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1878년(메이지11) 미야기현 포목상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시절 가톨릭 세례를 받았고,
대학 졸업 후 위안스카이의 장남 위안커딩의 전담 교사와 도쿄제국대학 정치학 강사 등으로 활동했다.
그의 행적을 본다면, 후쿠자와 유키치 이후 정치적 담론과 그 논의를 제공해준 다이쇼 최고의 재야 인사라 할 수 있다.
다만 요시노 사쿠조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달리 번벌파와는 거의 교류를 하지 않았고, 주로 민당파나 사회주의자와 교류했다.
그의 종교에서 유추가 가능하듯, 그는 원래 가톨릭 사회주의자들과 주로 교류했다.
애초에 그가 도쿄제국대학에서 강의하던 것 중 하나가 사회주의였고,
그가 도쿄제국대학 강의를 마치고 미국 유학을 갔을 당시는
가타야마 센 등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자들이 해외 교류망을 확장하던 시기였기에
자연스레 가톨릭 사회주의자와 가까워졌으리라고 생각된다.
요시노 사쿠조의 유학 생활 도중 메이지 덴노가 훙했다.
그리고 새로운 원호가 다이쇼가 된지 얼마 안된 1913년(다이쇼2), 요시노 사쿠조가 귀국했다.
귀국 후 요시노 사쿠조는 중앙공론 총편집장 다키카 쵸인의 요청으로 중앙공론에 글을 투고했다.
그런데 1916년 요시노 사쿠조는 중앙공론에 '헌정의 본의를 설명해 그 유종의 미를 다하는 길을 논함'
(憲政の本義を説いて其有終の美を済すの途を論ず)
이라는 약 100페이지가 넘는 글(잡지논문)을 투고했는데,
여기서 요시노 사쿠조는 일본의 정치가 가야할 길과 이룩해야할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한다.
세계 각국의 정치 형태를 소개하고 비교하며 입헌정치의 전제로 민본주의를 제시했고,
'일반 민중의 이익과 행복, 그리고 그 의향에 중점을 두는 정치 운용상의 방침'이라 민본주의를 정의했다.
일본의 사회경제학자이자 공산주의자 가와카미 하지메에 따르면
1910년대 중반에 이미 일본에서는 민본주의라는 말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그것이 정확히, 혹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했던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당시 우민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던 재야 인사들은 이 민본주의라는 단어를 기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16년 투고된 요시노 사쿠조의 글을 시작으로 일본에서 민본주의는 Democracy의 번역어로 채택되었고,
일반 대중을 번벌귀족과는 또다른 정치적 주체로 설정해나가기 시작했다.
요시노 사쿠조는 민본주의가 실현되기 위해 선거를 상당히 강조했다.
요시노 사쿠조는 초연주의를 봉건적 악폐습의 잔재라고 보았으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선거권을 확대하고 헌정을 개혁하여 정당정치를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러한 열망과 이해관계가 겹친듯, 과거의 민당파이자 당시의 정당정치인들이 요시노 사쿠조의 주장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다만 그 적극적인 호응은 1차대전이 끝난 후에야 본격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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