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다이쇼시대도 반 이상 적어내게 되었다.
1921년(다이쇼10)의 하라 다카시 총리 피습사건까지 적었고, 다이쇼시대가 1926년에 끝이 나니,
반은 진작에 넘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하라 내각은 다이쇼시대에 일종의 전환점 역할을 했다.
원했건 아니건, 하라 내각이 있던 기간 동안 수많은 정치적 변곡점이 있었다.
입헌정우회가 기존의 사이온지 긴모치 계열에서 하라 다카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중심으로 전환되었고,
얼마 안가 다나카 기이치가 입당하면서 정우회에 군국주의 성향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야마가타파 주요 군인들이 노쇠하여 요직을 떠났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마저 실각하면서 육군 조슈파가 힘을 크게 잃는다.
초연주의 번벌파의 새로운 중심축은 해군과 귀족이 되었지만, 중심을 잡아줄 인물이 대두되지는 않았다.
외교적으로도 군벌 분열로 인한 대중국정책의 변화, 파리 강화 회의 이후의 대영, 대미 관계의 약화, 남양청의 설치 등등,
다양하게 급변하는 양상이 두드러진다.
물론 이 중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정당정치의 완벽한 정착'일 것이다.
소위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불리는, 초연주의의 사실상 완전 소멸과 정우회-민정당의 양당제 구도가 이때 시작하여
쇼와시대 초반(1932년)까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자유민권운동
공의여론과 서남전쟁정한론 논쟁 이후 낙향한 정한파들은 전반적으로 오쿠보 정권과 메이지 신정부에 대해 부정적이었다.조선 정벌이라는 주제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에 불만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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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결과를 생각하면,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메이지시대 수많은 정치싸움의 결과가
이토 히로부미, 오쿠마 시게노부,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승리이자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패배로 귀결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당정치의 정착은 아쉽게도 자유민권운동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기는 힘든 감이 있다.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자유민권운동은 입지와 특권을 잃은 사족과 정치인들의 반정부 저항운동일 뿐
프랑스 혁명이나 1848년의 유럽 자유주의 혁명에 비하면 그냥 정치적 투쟁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이타가키, 고토, 오쿠마는 이토와의 협상 끝에 내각에 입성하며
자유민권운동을 나갔다가 들어왔다가 하는 양상을 반복했다.
그렇다면 반정부 불만에 근거했을 뿐, 사상적 요소가 적기에 자유민권운동을 고평가할 수 없다면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현상과 결과는 폄하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말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메이지 유신이 이룩한 수많은 업적과 영향 중 가히 최고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내가 썼지만 참 모순된 의견이라고 볼 수 있다.
자유민권운동을 깎아내리면서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올려치는 것은 이 둘 간의 중간과정과 정당의 행보를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용어 자체가 자유민권운동의 모순점을 무시하는 역효과를 포함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을 완전히 해소시켜줄 인물이 있다.
정말로 메이지 유신의 성과가 다이쇼 시대의 정당정치로 이어졌음을 증명해주는 인물,
일본식 공화정체에 사상적 근거를 추가해 준 인물,
그렇기에 학계에서 근대 일본의 정치사를 연구할 때 많이 주목하는 인물,
이 모든 설명을 한번에 가지고 있는 일본 근대 최고의 정치학자, 요시노 사쿠조이다.
나카에 조민이 일본 자유주의의 상징이라면, 고토쿠 슈스이가 일본의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을 대표한다면,
요시노 사쿠조는 '민본주의'의 발명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주장은 정당과 제국의회는 물론, 민간과 황실에도 전파되었고,
비록 1932년 이후 파괴되었지만, 그의 사상을 기반으로 일본은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그런데 볼 논문이 너무 많아 한 한달은 쉬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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