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굳이 그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서양사를 이 블로그에 적게 된 계기가 두개 있다.
그 중 첫번째 계기가 시에라에서 전해 들은,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정세를 '빈 체제'라고 한 정치학 교수의 말이었다.
개인적으로 반박하고 싶기는 했지만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는데, 반박하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정치학과 역사학 간의 해석과 시선의 차이를 개인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운이 좋은 편이라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정치학과 역사학의 시선 차이를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에 19세기의 유럽 정세의 시작점인 빈 체제로부터 계승된 당시의 '유럽적 가치' 비슷한 그런 걸 강조하고자 하는 걸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당시의 주제가 빈 체제와 비스마르크 체제의 구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애초에 시에라는 역사학 모임이 아니라서 이런 얘기할 곳은 아니긴 했다.
참고로 당시의 메인 토픽은 트럼프와 국제 정세였다.
마지막으로, 그 주제를 논함에 있어 '비스마르크 체제'를 '빈 체제'로 대체한다 해서 논점에 문제가 없었다.
당시 논하던 소주제는 패권 구도에 대한 비판이었는데, 그 분이 말씀하고자 했던 건
유럽의 패권 구도와 그 경쟁이 1차대전으로 이어지며 빈 체제(비스마르크 체제)는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단어의 오용에 대해서는 굳이 시비를 걸 수 있지만, 내용면에서는 조금도 틀린 바가 없이 공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굳이 이를 반박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어 결국 반박하지 않았음은 빈 체제와 비스마르크 체제가 공유하는 부분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물론 두 체제 간 우열을 따지자고 한다면 빈 체제는 뚜렷한 실패였던 것과 달리
비스마르크 체제는 분명 성과를 보인 체제였다.
그리고 일정 부분에 있어서는 꽤 차이를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번 빈 체제와 비스마르크 체제를 비교해 보고자 한다.
1814년 메테르니히에 의해 출범된 빈 체제는 다음과 같은 목표를 지녔다.
절대 왕정으로의 복고 및 자유주의 탄압, 5개국 동맹 체제를 기반으로 한 유럽의 세력 균형 및 평화
전자의 경우 프랑스 혁명으로 왕의 목이 잘리는 충격으로부터 귀족층이 받은 영향이라 생각할 수 있고,
후자의 경우 나폴레옹 전쟁과 같은 과도한 전쟁을 막고자 한 방어주의적 태도라 볼 수 있다.
이를 외교적인 면에서만 본다면 상당히 많은 부분이 결여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경우를 감안하지 않았다.
이는 1821년 발발한 그리스 독립전쟁으로 그 설명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이슬람 대한 모순성을 반박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빈 체제는 군사력에 기반한 기구가 아니었기에 패권을 조율하여 평화를 유지할 수단이 없었다.
막말로 그리스 독립전쟁 당시 메테르니히는 '호소'했을 뿐, 그 어떠한 관여에도 실패했다.
그렇다고 영국과 러시아의 이권에 도전해 군사적으로 부딪힐 도박을 할 수도 없었다.
1870년대와 그 이후의 비스마르크 체제는 일종의 정치적 실리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 정치적 실리는 바로 '반불 외교'와 '독일의 성장'이었다.
이 두가지 종류의 실리는 국제적 입지면에서 독일을 신생 강대국이 아닌 유럽 정세에 모두 손을 뻗힌 강대국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었고
실제로 독일은 그 정도 입지까지 성장해냈다. 이는 분명한 성과라 할 수 있겠다.
특히 19세기 초반보다도 빠르게 확장되어가는 유럽 강대국의 패권을 조율함에 있어
비스마르크의 태도는 어쩌면 당대 그 누구보다 평화롭고 실리주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비스마르크의 집권기 중에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영국과 러시아 간 전쟁의 불씨만 있었지 실제 전쟁은 없었으며,
프랑스는 이 당시 외교적으로는 독일에 제대로 탄압받던 중이었다.
그리고 조율자-중재자 역할을 함에 있어 그 원동력이 된 것은 보오전쟁과 보불전쟁을 순식간에 끝낼 수 있었던
독일의 군사력이었다.
즉 빈 체제와 달리, 비스마르크 체제는 군사력을 기반으로 하여 그 입지와 실리를 모두 챙겨나가며
유럽의 패권 균형을 이룩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스마르크 체제의 외교는 일종의 이상적 외교일까?
그렇게 보기는 힘들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애초에 이러한 방향성의 외교가 현실주의에 입각한 것이기에 '이상적'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는 좀 그런 감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1차대전이라는 결과가 반증하듯, 패권 균형의 유지는 결과적으로 힘들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 체제의 결말도 빈 체제의 결말과 유사한 과정을 거쳤다.
어쩌면 더욱 처참한 파괴를 겪었다 말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비스마르크 체제는 그 주축인 독일 제2제국이 스스로 파괴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있어 후술해야할 부분을 최대한 배제하고 말을 하자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시할 수 있다.
패권을 유지하면서 패권국 간의 양보를 반복할 수 있는가?
승패라는 이분법적인 극단주의 해석을 배제하고 싶지만, 상호 간의 양보가 과연 반복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한 리더가 영원히 집권할 수가 없는데,
리더의 교체로 인한 능력이나 리더쉽의 변화가 이 체제를 온전히 유지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대신 일종의 국제기구를 두어 패권 균형을 유지시킬 수는 있겠지만
애초에 과연 다수의 패권국 간의 이권 조율이라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절대 아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패권국 간 마찰이 일어났을 때 이것이 전쟁으로 이어지지 말란 법은 없지 않다.
그러면 이런 식의 위험요소가 반복되면 패권국의 패권에도 지장이 생길 것이고 평화도 유지되기 힘들 수 있다.
그렇다면 현실주의적 실리가 과연 실리일까?
2차대전 이후 빈 체제나 비스마르크 체제와 같은 현실주의적 외교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헨리 키신저이다.
메테르니히를 고평가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자 영광스러운 고립을 미국에서 재현시키고자 한 인물로,
미중 간 국교 수립 당시 한반도와 대만을 포기하고 중국의 패권 영향력으로 인정하고 미군 철수 등으로 실리를 취하자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키신저의 현실주의적 외교관이 거의 반영되지 못한 데에는 당시 미소 간 패권 경쟁이 진행 중이었고
중국의 성장으로 소련을 견제하는 것은 미국의 입장에서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은 한국, 일본, 유럽 등에 대해 벨 에포크 시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나 러시아 제국처럼
영향권 내의 국가와 그 정부를 함부로 조종하기 보다는 여러 이유로 비교적 관대하게 개입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저 시대의 미국의 방향성에서 키신저의 외교론은 현실주의적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2024년 11월 6일, 미국 대선의 결과로 도널드 트럼프가 다시 한 번 백악관의 주인이 되었다.
트럼프의 외교는 키신저와 비슷한 일종의 현실주의적 관점을 가졌다고 생각된다.
(비록 한국에 대해서는 한국의 국정 마비로 중단된 감이 있지만)한국에 대해 국방 분담금과 관세 논의를 제기하고,
일본에도 같은 논의를 제기함과 동시에 이시바 시게루로부터 무조건 수용을 이끌어냈으며,
우크라이나에는 일방적으로 광물협정을 강요하고 있다.
반면 미국(트럼프)의 시각에서 보이는 패권국들, 즉
러시아와 사우디에 대해서는 이러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
러시아를 통해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고, 사우디를 통해 중동 정세 안정과 미국의 국방비 절감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트럼프는 현재 러시아의 패권을 인정해주는 모습을 보이는데,
빈 체제와 비스마르크 체제가 어떤 과정과 결과로 이어졌는가?
이것이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사족으로 맨 위에 언급한 두 계기 중 두번째 계기는 그레이트 게임에 대한 것으로
시에라랑은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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