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질문을 던져보자.
러시아는 아시아인가? 아니면 유럽인가?
현실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러시아는 유럽임이 확실하다. 하지만 이를 잠시 배제하고 다시 생각해보자.
러시아는 아시아 국가인가? 아니면 유럽 국가인가?
몽골의 말발굽 아래 수많은 국가가 무너져갔다.
금, 서요, 고려, 서하, 아바스 왕조, 셀쥐크 투르크 등등
그리고 몽골의 기마대는 루스 차르국을 향했고, 러시아는 200년 간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를 타타르의 멍에라고 한다.
1480년 이반 3세는 러시아의 열국을 자신 중심으로 통합시킴과 동시에 타타르의 지배로부터 러시아를 해방시켰다.
이후 러시아는 몽골식 복식을 폐기하고 다시 동슬라브족의 국가로 부활하려했으며
심지어는 멸망한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임을 선언했다.
물론 그 권위는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1682년 즉위한 표트르 1세는 러시아를 완전히 유럽화하고자 마음 먹었다.
수많은 사절과 유학생을 보내 서유럽의 문물을 수학하게 했으며,
심지어는 자신도 서유럽에 잠입해 서유럽의 기술과 제도를 익혔다.
그렇게 러시아는 성장했고 강대국이었던 스웨덴을 몰락시키고 영토와 발트해 제해권을 획득했다.
1721년 표트르 1세는 공식적으로 러시아 제국의 출범을 선언했고, 그 누구도 반박 못할 동유럽 최강국의 등장을 온 유럽에 알렸다.
물론 이때까지도 아무도 이를 인정해주지는 않았다. 그래도 군사 강국이라는 점은 나름 인정 받았다.
1725년 표트르 1세가 붕어하기 직전, 그는 14개조로 이루어진 유언장을 남겼는데
이는 앞으로 러시아 제국이 이룩해야할 목표를 설정해주는 것이었다.
(다만 이 유언장은 조작되었거나 허구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므로 가볍게 파악바람)
1. 러시아인을 끈임없는 전쟁의 상태로 두어, 전쟁을 평화로, 평화를 전쟁으로 이용해 영토의 확장을 도모해라.
2. 전시에는 가장 훌륭한 군인을, 평시에는 가장 훌륭한 학자들을 총동원하라.
3. 모든 수단을 활용해 유럽의 정세에 개입해 분열시켜라.
4. 폴란드에 불화를 유도하여 분열시켜라.
5. 스웨덴을 끊임없이 약화시켜라. 이를 위해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를 분열시켜라.
6. 모든 러시아 황제는 독일 공주와 결혼해라.
7. 영국과 포괄적 동맹 관계를 맺고 유지해라.
8. 발트해와 흑해로 진출하라.
9. 가능한 한 콘스탄티노플과 인도로 가깝게 진출하라. 이 곳의 주인이 세계의 주인이 될 것이다.
10. 오스트리아는 공개적으로는 러시아를 지지해주지만, 그들은 속으로 러시아를 적으로 여기고 있다.
11. 오스트리아와 협력하여 오스만 튀르크를 몰아내라.
12. 동유럽 정교회 세력의 보호자를 자처하여 정교회 세력을 러시아로 편입시켜라.
(13조와 14조는 편의 상 생략)
출처: 러시아어 위키백과
Завещание Петра Великого — Википедия
Материал из Википедии — свободной энциклопедии «Завещание Петра Великого» (фр. Le Testament de Pierre le Grand) — русофобская[1][2][3] политически тенден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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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9조는 어떻게 보면 러시아의 지정학적 문제점과 전략적 목표를 상징하는 것이나 다름 없겠다.
유명하듯, 러시아의 궁극적 목표는 부동항과 해양진출이다.
그나마 스웨덴과의 전쟁으로 발트해에 항구(상트페테르부르크)를 획득했지만, 발트해는 겨울이면 꽁꽁 언다.
흑해는 얼지 않지만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이 막히면 호수나 다름 없어진다.(참고로 이 두 해협은 한강 하류보다 좁다.)
그렇기에 표트르 1세 사후 러시아의 전략적 목표는 부동항, 그리고 남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타타르의 멍에에서 벗어난 이후 러시아는 무려 12 차례나 오스만 튀르크 제국과 전쟁을 치뤘다.
이를 러시아-튀르크 전쟁이라 하는데,
참고로 10차 전쟁이 그리스 독립전쟁, 11차 전쟁이 크림전쟁, 12차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것이 산스테파노 조약이었다.
그리고 결과만 보자면 일단 러시아가 이득을 훨씬 챙겨갔다.
이러한 콘스탄티노플 방면으로의 남하말고, 인도 방면의 남하를 생각하자면
그 길목에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칸국들(지금의 ~스탄 국가들)과 페르시아(카자르 왕조)가 있었다.
러시아는 이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중앙아시아를 영토로 확보했고,
페르시아에 대한 수많은 이권을 차지했다.
거리가 상당히 멀어지기는 하지만, 잘 알듯 시베리아 방면으로 진출했다.
청과의 무력 충돌까지 있었지만 이 당시에는 이런저런 난관으로 인해 양측 모두 추가적인 무력 충돌은 피하고자 했다.
결국 청러 간에 네르친스크 조약과 캬흐타 조약이 체결되어 양국 국경이 확정되었다.
그렇게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본토'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급격한 성장은 기존 유럽의 정세를 주도했던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위협이라고 여겨졌다.
원래 유럽에서 가장 많은 인구와 영토를 보유한 프랑스보다도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함과 동시에 결국 인구에서도 프랑스를 추월해냈기에
영국은 특히 러시아를 눈 앞의 프랑스보다도 더욱 큰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입증할 러시아의 저력을 보여준 사건이 바로 나폴레옹 전쟁이었다.
러시아 원정의 실패는 곧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를 패배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과 동일한 수준의 외교적 입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러시아를 잠재적 위협이라 보던 영국은 일단 러시아의 기세를 한 번 꺾어야 한다고 판단했고
이를 위해 굳이 오스만 튀르크 제국을 지원했다.
그 결과 발생한 것이 크림전쟁이었다.
크림전쟁에서 러시아가 대패했음은 러시아에 있어 다양한 과제를 제공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선 영국의 지원 하나만으로 크림전쟁에서 러시아는 패배했다.
즉 당장의 여력으로는 러시아는 절대로 서유럽 국가들과 싸워서 이길 수 없음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다르게 말하자면 러시아가 표트르 1세 이래 해왔던 노력의 결과가 아직도 미미함을,
즉 이대로면 유럽에 곡물을 대는 주변 국가로 전락할 수 밖에 없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게다가 러시아는 정교회 세력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유럽의 일부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는데,
아시아 국가인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에서 유럽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 국가 러시아와 적대했음은
어찌 보면 엄청난 배신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크림전쟁 이후 러시아는 유럽 방면으로의 진출을 일단 포기했다.
그 대신 중앙아시아로의 진출을 본격화했으며, 선술한 중앙아시아 칸국을 영토로 편입한 것도 이때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내정 개혁과 군사력 강화에 치중했으며 산업 혁명도 본격적으로 시작시켰다.
그 과정에서 국가정체성을 유럽 국가에서 유럽의 아시아국가로 전환시키며
정교회의 보호자에 이은 '아시아의 보호자'로 제국주의 확장을 이어나갔다.
비스마르크 체제와 패권 균형 외교
1848년 유럽의 변동, 그리고 독일 통일1848년은 혁명의 해라고 불리운다.시칠리아의 독립선언에서 시작된 자유주의의 열기가 프랑스 2월 혁명으로 폭증했고,이 열기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나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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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확장은 수에즈 운하 건설과 인도의 식민지화를 완성시킨 영국의 시각에서는
직접적인 도전이라고 여겨졌다.
따라서 영국은 페르시아에 대한 러시아의 과도한 이권을 견제하려했고
산스테파노 조약에 항의하며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상당히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영러 간의 패권 경쟁을 거인들의 대결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고 한다.
그리고 러시아의 남하가 인도에 도달하는 것을 막을 전초기지로 1880년 아프가니스탄을 보호국화했다.
이러한 영국의 지속적인 견제에 러시아도 전쟁을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내정 개혁이 완성된 것도 아니었고, 러시아도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며 인프라 부족에 대한 문제를 깨닳게 되었다.
게다가 영국과의 전면전 자체가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일이기는 했으니
러시아는 우선 발칸반도와 페르시아 방면의 남하를 중단하고 영국을 피하여 부동항을 확보하고자 했다.
1860년 10월 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청은 영국, 프랑스와 베이징 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그 중재자로 나선 러시아에게 연해주를 할양했고, 러시아는 태평양 방면의 영토를 얻게 되었다.
이 이후 연해주 방면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있어 제3의 길처럼 인식되었고
발칸반도와 페르시아 방면의 남하가 중단되며 러시아는 동아시아 방면의 남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연해주 최남단의 항구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마저 부동항이 아니다.
(기가 막히게도 유빙은 두만강 하구 이북에서 멈춘다)
이러한 러시아의 움직임을 파악한 영국은 결국 영광스러운 고립을 포기하는 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상징적인 사건이 1885년의 거문도 사건이었다.
거문도 사건은 영러관계가 악화되어있음을 전세계에 알리는 사건이자
러시아의 남하가 곧 동아시아의 무력 충돌을 야기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보여준 사건으로,
(막상 당사자인 조선을 제외하고) 청과 일본마저도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며 국제정세에 집중하게 된 사건이었다.
그 이후는 대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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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과정을 겪고 러일전쟁으로 이어졌다.
1891년 독일 제2제국의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 체제를 폐기하고 세계 정책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그 과정에서 독러 재보장 조약이 독일의 단독 요구로 폐기되었고(갱신을 안함)
독일은 확장주의의 대상에 러시아도 포함시켜 나갔다.
갑작스러운 독일의 군사력 강화로 인해 러시아는 큰 위협을 느꼈고, 결국 현실적인 이유로 러시아는 남하를 포기했다.
(러일전쟁의 패배로 남하와 독일 견제를 투트랙으로 가져갈 여력도 사라진 상태였다.)
1907년 영국과 러시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영러협상을 체결했다.
페르시아의 이권에 대해 삼분할하여 영러 양국의 이권을 조정하고 중앙아시아 방면에서 양국의 패권을 조정하는 대신
상호간의 적대관계를 완전히 청산했다.
영러협상은 그레이트 게임을 종식시킨 것으로 여겨지며, 영러협상으로 인해 그레이트 게임은 사실상 영국의 승리로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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