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쇼와4) 다나카 기이치가 총리직에서 사임했고,
제국의회 중의원을 장악하고 있던 입헌민정당의 대표 하마구치 오사치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분명 정우회와 민정당, 두 정당 간의 의석 수는 2석 차이로 정우회가 우위를 점했는데,
약 1년 여 기간 동안 민정당에 수많은 의원들이 합류한 건지, 제국의회 제1당이 입헌민정당으로 교체되었다.
이거 왜 그런건지 나름 찾아봤는데 자료를 못찾았다.
황구툰 사건 이후의 혼란은 총리가 바뀐 이후에 바로 잠잠해진 게 아니었다.
봉천군벌은 국민정부와 힘을 합친 후 소련으로부터 이권을 회복하려했고,
마침 소련도 러시아 혁명 이후 중국 방면에 대한 이권을 복구하려 노력하기 시작했기에, 양측은 결국 충돌하게 되었다.(봉소전쟁)
한편 11월에는 광주의 학생들이 차별과 하대에 대해 불만을 표하며 시위를 시작했고,
이 시위가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되며 약 4개월 간 한반도 전역에서 항일 시위가 지속되었다.
이를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라 하며, 3.1 운동 이후 일본이 그렇게나 막으려 했던 조선의 전국적 항일 시위였다.
다만 이러한 혼란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별것도 아닌, 진정시키기 쉬운 단순 소요 사태였다는 말이 아니다. 더 큰 게 오기 때문이다.
1929년 10월 24일 미국 뉴욕증권시장에 대폭락의 검은 그림자가 닥쳐왔다.
이는 영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를 증폭시켰고, 다우지수는 1933년(쇼와8)까지 폭락을 멈추지 않았다.
미국과 유럽의 주요 기업은 파산하고 붕괴했으며, 각국 정부는 이를 막아내려 온 힘을 다했으나 대폭락은 진정되지 않았다.
기업이 무너지니 회사원들은 하루 아침에 길거리에 나앉았고, 가장의 수입이 사라지니 시장의 수요는 급격히 추락했다.
상대적 물가는 증가해 가는데, 절대적 수입은 감소하고, 거의 전분야의 산업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세계대공황이 찾아온 것이었다.
다만 일본의 경우 그 피해가 비교적 적었다.
세계대공황과 그 후폭풍에 덮쳐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미 일본은 1926년(다이쇼16) 시작된 대공황에 이미 들어와 있었기에 그 피해와 충격은 다른 나라에 비하면 적었다는 것이다.
다만 전세계가 대공황에 피해에 신음했던 만큼
비교적 피해가 적었던 일본이라 해서 대공황으로부터 파생된 새로운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익히 알려져있듯 광활한 식민지를 보유한 영국과 프랑스는 파운드 블록과 프랑 블록을 형성해 식민지를 경제적으로 착취했고,
이를 이용해 대공황으로부터 어느 정도 회복해내는 데에 성공했다.
다만 이건 조금 나중의 이야기이고,
일단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는 국가 지출을 줄여서 그 여유분을 대공황 해소에 투여하는 것이겠다.
그렇다면 당장 줄일 수 있는 예산분은 어디겠는가? 전간기의 평화에서 가장 만만한 건 군비가 아니었을까?
1930년(쇼와5) 제네바 군축 회담의 재개 목적으로
영국 런던에서 1차대전 전승국(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의 대표자가 회담을 가졌다.
이 런던 군축 회담에 결과로 런던 군축 조약(혹은 런던 해군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 조약에서 5개국은 해군 규모를 더이상 증설하지 않을 것이며 현재 진행 중인 군함의 건조를 중단하겠다 합의했다.
(세부 내용에서 보조함 등에 대해 이견이 갈리기는 했으나 이 부분은 제외함)
이 조약은 당연히 해군 증강을 강조하던 해군 인사들의 반발을 살 수 있는 것이었지만,
런던 군축 회담의 대표로 해군대신을 역임했던 당시 해군의 얼굴 중 한명,
사이토 마코토가 참여했기에 함부로 반발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해군은 기존에 함대 증설을 강조했던 '함대파'와 런던 군축 조약과 사이토 마코토를 지지하는 '조약파'로 나뉘기 시작했다.
참고로 함대파는 메이지 시대부터 존재한 전통 있는 파벌이었으며,
함대파의 존재에서도 알 수 있듯, 해군이라고 해서 강경하지 않았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육군이 더한 광기였을 뿐이지.
세계대공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일본의 노력은 군축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전세계적인 금본위제 복고 분위기에서 일본도 금본위제로의 복귀를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실리를 취함과 동시에 재정적 여유를 얻으려 1920년대 이후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금 해금 논의를 부활시켰다.
금본위제 관련 이야기는 여기로
1920년대 영미의 통화 정책과 금본위제
정보이 내용은 Gemini의 도움을 100% 받아서 작성했음을 알립니다.서양사 몰러유 금 해금과 본격적인 군축 정책1929년(쇼와4) 다나카 기이치가 총리직에서 사임했고,제국의회 중의원을 장악하고 있
mtw31082.tistory.com
하마구치 내각의 외무대신이었던 이노우에 준노스케는 기본적으로는 금 해금에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지만
대공황의 피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긴축 재정과 더불어 금 수출 해금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시켰다.
이를 이노우에 재정(井上財政)이라고 한다.
긴축 재정의 경우 군축과 더불어 실시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금 해금 조치에 대해 잠시 말하자면, 일본은 금본위제 폐지 이후 국가 보유의 금을 수출하지 않았고
심지어 이를 법적으로 막아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이 금본위제로 복귀하며 구미세계에 금 수요가 증가하자 이를 기반으로 이득을 취하자는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금은 덴노헤이카의 재산이잖아. 덴노의 수행인인 문관 정치인과 관료가 감히 이걸 팔아?
그리고 일본의 군대는 덴노헤이카의 군대인데 덴노의 수행인인 문관 정치인과 관료가 감히 덴노헤이카의 군대를 축소해?
반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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