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문명이 멸망한 날-1932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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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전전 쇼와
쇼와 7년 5월 15일오카와 슈메이, 니시다 미쓰기 등 국가주의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전 혈맹단원 미카미 다쿠를 필두로,해군 장교, 육군 사관생도 등으로 이루어진 12명의 인원은 계획한 장소로 이동하여 제거할 타겟을 노리기 시작했다.그리고 이 중 9명이 총리 관저로 이동했다는 걸 생각하면,이들의 핵심 목표는 명백히 내각총리대신 이누카이 츠요시였다. 오후 5시. 야스쿠니 신사에 집결한 가담자들은 승용차를 타고 각자의 포인트로 이동했다.5시 27분 승용차는 총리 관저에 도착했고, 경호원에게 총격을 가한 후 총리 관저를 습격했다.이후 총리 관저 습격조는 앞문조와 뒷문조로 갈라졌고, 마침내 식사 중인 이누카이 츠요시 총리를 찾아냈다.해군 장교들은 이누카이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밀었으나,이 사단을 예상이라도 한..
폭풍전야, 이누카이 내각의 출범과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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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전전 쇼와
1931년(쇼와6) 12월, 이누카이 츠요시가 내각총리대신에 내정되었다.기존의 입헌민정당 내각인 2차 와카츠키 내각은 퇴임했고, 그 자리를 대체한 입헌정우회의 국무대신들이 각종 정책을 수정해나갔다.이노우에 준노스케의 긴축 재정 정책은 다카하시 고레키요에 의해 수정을 거치게 되었고,시데하라 기주로의 협조 외교 역시 폐기 수순을 밟아갔다.입헌정우회는 기본적으로 초연주의 군부와 자유민권운동 사이에서 일종의 중립파처럼 자리한 정당이기에입헌민정당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군부 친화적인 정책을 취해 나갔던 것이다. 이누카이 츠요시가 총리에 내정된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다.1차 오쿠마 내각(와이한 내각)에서 문부대신에 임명되며 내각에 진출했고,자유민권운동, 1차 호헌운동, 2차 호헌운동을 모두 참여한 정치 베테랑이기에입헌정..
혈맹단 사건으로 드러난 비문명적 사법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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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전전 쇼와
일본의 사법체계는 근대화라는 이상을 실현하고 조약개정 과정에서 영사재판권을 폐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그 결과 만들어진 대일본제국 헌법과 제국의회의는 동아시아에 탄생한 서구문명 '일본'으로서의 자부심과 자존심을 만들어주었고,이러한 자부심은 청일전쟁의 승리와 대만, 조선의 식민지 병합을 통해 더욱 고조되었다.당시 정치에서 헌법에 기반한 법치주의, 입헌군주정은 일본 정치의 위상이며 상징이자 자부심이었고,정우회와 민정당의 이름 맢에 '입헌(立憲)'이라는 두 글자가 붙은 것 역시 이를 방증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근대 일본은 삼권분립이 완전하게 실현된 체제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행정부(내각), 입법부(제국의회), 사법부(최고재판소)의 권한과 권위는 모두 덴노헤이카가 부여한 것이며,그들..
통제파와 황도파, 일본 육군이 지닌 정치에 대한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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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전전 쇼와
쇼와 덴노가 덴노에 오른 1926년(쇼와1) 12월부터 2차 와카츠키 내각이 퇴임한 1931년 12월까지대략 5년 간의 기간은 근대 일본에 있어 가장 급격한 내부 변동이 일어났던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물론 다른 특정 5년을 비교했을 때 비슷한 규모, 혹은 더 큰 규모의 변동이 있었던 해도 존재한다.그럼에도 내가 이 쇼와 첫 5년 간의 변동이 중요하다고 본 이유는,다른 시대의 변동과 달리, 이 시대의 변동은 정치권이 아닌 군부 중심이었기 때문이다.그렇기에 이 시대의 변동은 빠르고 은밀하게 사회전반을 잠식해갔다.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자면 1920년대 중후반 발생한 군부의 변화를 살펴봐야 할 것이겠다.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실각과 함께 육군을 장악하고 귀족들과 유착되었던 야마가타파 육군은 사실상 몰락했다.그 ..
성자와 성부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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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사회&정치
非가톨릭교도로서프란시스코 교황 성하가 보여주신 종교적 포용성에 많은 영감과 감사함을 느꼈고,방한 당시 보여준 그 자애로움에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소천하시기 전에 바티칸에 방문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만주사변에 대한 평가, 성과와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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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전전 쇼와
전전 쇼와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 혹은 전전 쇼와를 평가하기 위한 시선이나 방향성은전반적으로 두 차례의 원폭 피해와 2차 대전 패배에 맞추어져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1. 근대 일본은 왜 실패했는가?2. 근대 일본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가? 근대 일본의 실패에 있어 그 직접적인 원인이 군부의 광기임은 좌우, 일본 국내외를 막론하고 동의하는 바이다.그렇다면 적어도 이 광기를 제어할 여지가 아예 없었는가?아니면 이 광기를 유화시킬 기회는 없었는가?이 부분에 대한 담론은 193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다. 만주사변과 정당협력1931년(쇼와6) 2차 와카츠키 내각이 출범했고, 하마구치 내각의 시기와 와카츠키 내각의 시대를 합쳐서 생각해봤을 때와카츠키 레이지로는 총리로 짬을 맞고만 살았다고 생각한다.1..
솔직히 좀 ㅈ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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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아니 말이 안된다.아무리 플랫폼에서 오는 태생적인 차이가 크다고 하지만, 이게 말이 되나?티스토리에 쓰는 역사글은 나무위키와 위키백과 이상의 퀄리티라고 자신할 수 있는데,조회수는 쥐꼬리만큼 나오고.네이버 블로그에 쓴 WWE 이야기는 이틀간 조회수 360회를 넘기네?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AI는 도구다, 인문학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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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얼마 전, 평소보다 글이 잘 써지지 않던 날이었다.가볍게 개요나 짜보자 하고 챗GPT를 열었고, 결과는 예상보다 괜찮았다.내가 머리로만 맴돌던 흐름을 정리해주는 문장이 제법 자연스러웠고, 그걸 토대로 내 글을 이어가는 건 생각보다 수월했다.‘AI는 쓸모 있다.’ 요즘 들어 자주 드는 생각이다. 특히 문과라면 더 그렇다.사실 인문학 기반 글쓰기라는 건 꽤 시간이 오래 걸린다.개념 정리, 문장 구성, 맥락 연결, 근거 확보…이 모든 과정을 혼자 해야 한다는 건 꽤 피로한 일인데, AI는 이걸 ‘도와주는’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예를 들어 내가 다루는 일본사 글에서, 특정 인물의 행적을 빠르게 훑어보고 싶을 때챗GPT를 통해 요점을 정리하고 그걸 토대로 사료를 대조하면, 시간이 절반 가까이 줄어든다.물론 AI가..
만주사변과 정당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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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전전 쇼와
1931년(쇼와6) 2차 와카츠키 내각이 출범했고, 하마구치 내각의 시기와 와카츠키 내각의 시대를 합쳐서 생각해봤을 때와카츠키 레이지로는 총리로 짬을 맞고만 살았다고 생각한다.1차 와카츠키 내각은 2차 호헌운동 이후 입헌민정당(당시에는 헌정회)과 입헌정우회 간 경쟁 구도에가토 총리 병사+다이쇼 덴노 붕어+쇼와대공황이라는 3콤보가 닥쳐왔던 상태였다.그리고 그 난관 속에서 귀족원이 작정하고 입헌정우회의 다나카 기이치를 밀어주면서 붕괴했다. 2차 와카츠키 내각도 비슷했다.황구툰 사건+대공황+군축 논의라는 삼박자가 조화를 이루며 내각을 괴롭혀왔는데,육군은 육군대로, 입헌정우회는 입헌정우회대로 비협조적이었고,결국 만주사변이라는 괴상한 참사를 맞닥뜨려야 했다. 물론 그렇다해서 2차 와카츠키 내각을 지원해줄 기반이 ..
표면화되는 육군의 쿠데타, 그리고 근대 일본의 아쉬운 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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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전전 쇼와
개인적으로 나는 '군법'이라는 존재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물론 이게 법이나 사상에 논리적으로 근거한 원칙 기반의 혐오감은 아니다.그리고 군대라는 조직사회는 일반적인 사회와 다른 특수한 조직이고 사회라는 점은 충분히 인정한다.다만 이 군법의 존재로 인해 나오는 폐단이 있어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예를 들어 버닝썬 사건 이후 관련자들이 입대하여 처벌의 수위를 낮추었다던가 그런 것이 있겠다. 근대 일본의 경우도 맥락은 비슷하다.심지어 당시의 군법은 뭐랄까...형법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법으로 작동했고 그렇기에 이에 따른 비논리적 징계가 이어지기도 했다.그리고 이 비논리적 징계를 제대로 표현하자면 솜방망이 징계가 적절하겠다.형법이 적용되었더라면 사형, 무기징역, 5년 이상의 징역이 나왔어야 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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