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노세키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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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우장이 넘어가면서 요동과 산해관 사이 그 모든 군사적 방해물이 사라졌다.산해관에서 청이 마지막 발악이야 하겠지만, 주력군이 무너졌으니 결과는 뻔하고, 그 다음은 북경이다.북경에 있는 청 조정이 도망칠 시간도 부족했다. 산동에서 북진하는 일본군도 있었기 때문이었다.갈 곳도 성도가 최선인데, 지구전으로 가는 것 자체가 수모였다.아니 운 나쁘면 가다가 잡힌다. 결국 청은 종전협상을 제의하며 항복의지를 보이게 되었다.근데 일본은 싫대.북경 먹을 거고 청은 뒤지래. 이토 히로부미와 무츠 무네미츠는 전쟁을 끝낼 생각이 조금도 없었고그냥 이참에 청을 부숴버리자는 생각이었다.그러니 청의 핵심 중의 핵심이라 할 공친왕이나 이홍장이 직접 일본에 오지 않는 이상 협상은 없으며,와도 협상따위 질질 끌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그..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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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풍도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그대로 상륙해 성환(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에 주둔중인 청군을 격퇴했다.이후 경기도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평양성으로 향한 청군을, 남으로는 전라도의 동학군을 상대했으며,우금치에서 동학군은 궤멸, 평양성 전투도 조선 관군이 암묵적으로 청을 지원했음에도 일본이 승리했다.전장은 요동으로 넘어갔으며, 웨이하이 전투에서 청이 자랑하는 북양함대는 전멸했다.대만과 펑후열도가 일본의 손에 넘어갔고우장 개항장이 함락되었고 일본군이 산동반도에 상륙해 북경을 향해 진군하자청은 주력군이 전멸하여 수도가 함락되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렸고,이토 히로부미 내각총리대신과 무츠 무네미츠 외무대신이 종전협상을 거부하자이홍장이 노신을 끌고 이토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시모노세키에서 청일강화조약을 체결했다.1895..
조약개정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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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조약개정 3조약개정 2조약개정 1이와쿠라 사절단대정봉환과 메이지 덴노의 즉위 사실은 당연히 외교관계가 설정된 모든 국가에 전달되어야 할 사항이었고,비교적 가까운 조선의 경우 금방 보낼 수 있었지mtw31082.tistory.com3편은 여기로 조약개정에 한정되지 않고 2차 이토 내각의 청일전쟁 이전 외교 활동을 다룰 것이다.물론 핵심은 영일통상항해조약이다.부제목은 '조약개정의 완성'정도가 좋겠다.정한론 논쟁이고, 임오군란 이후 재점화된 정한론 열풍이건,방법론에 차이가 있었을 뿐 조선을 장기적인 점령대상으로 본 건 번벌파와 민권파가 동일했다. 1892년(메이지25) 2차 이토 내각이 출범했다.2차 이토 내각은 출범과 동시에 국회를 장악했고 선거 간섭으로 번벌파에 반발하던 민권파를 회유하려 노력했는데,이타가..
청일전쟁 직전의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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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메이지 유신을 통한 일본의 산업혁명은 분명 성공했다.이 부분을 부정할 수는 없다.그런데 시대가 시대라서, 메이지 시대의 산업혁명은 큰 한계점을 대동하고 있었다.바로 산업혁명으로 성장한 기업들은 내수시장에만 의존했다는 것이었다.물론 무역 수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관세자주권이 없어 이에 의존하기는 힘들고,애초에 원자재는 주로 외국에서 수입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철광석은 수입 없이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그렇다고 외국에 일본 물품을 팔아봤자 큰 도움이 된 것은 아니었다.구미 열강의 식민지는 애초에 그 존재가 구미 열강의 상품을 판매할 목적도 있었기에 일본 상품이 낄 틈이 없었다.그나마 청과 조선에 대해, 특히 대조선 무역에서는 대규모의 흑자를 보였던 것도 사실이나상인을 중심으로 격화되던 조선의 반외세..
1890년의 경제공황과 해외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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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일본의 산업 혁명은 아시아의 어느 나라보다도 성공적이었다.1884년(메이지17)부터 관영공장이 몰락하기 시작하면서 민간기업에 공장을 불하했는데,이는 오히려 민간기업과 자본의 성장을 촉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해원대를 기반으로 한 미쓰비시 상사는 해운 사업으로 대박이 났고,소매업으로 시작한 미쓰이는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 민관합동 운수회사를 설립했다. 그런데 이러한 성장은 영원하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말이다.1890년 일본에 경제공황이 들이닥쳤다.마쓰카타 재정으로 시작된 디플레이션 및 증세의 역효과는 시간이 지나며 퇴색되었지만기업체들의 성장과 무역량의 증가로 점차 일본 경제는 세계경제의 일부로 완전히 흡수되었다.그리고 이 부분이 문제였다.미국에서 시작된 대불황의 여파가 일본에 덮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일본은..
오쓰 사건의 후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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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조약개정 3조약개정 2조약개정 1이와쿠라 사절단대정봉환과 메이지 덴노의 즉위 사실은 당연히 외교관계가 설정된 모든 국가에 전달되어야 할 사항이었고,비교적 가까운 조선의 경우 금방 보낼 수 있었지mtw31082.tistory.com오쓰 사건일본의 극단주의적 성향이 잘 드러나는 천주이자, 천주의 무의미함을 대표하는 사건이다.이 사건 하나로 조약개정에 4년을 더 소비했다고 봐도 무방하다.그리고 일본의 사법부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다.이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보고자 한다. 츠다 산조가 니콜라이 황태자를 공격한 것은 두가지 이유가 있다.우선 당시 일본에는 러시아의 남하에 대한 공포감이 즐비해있었다.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착공이 그 계기이기는 하지만, 에도시대부터 이양선은 대부분 러시아가 보낸 것이..
조약개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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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조약개정 2조약개정 1이와쿠라 사절단대정봉환과 메이지 덴노의 즉위 사실은 당연히 외교관계가 설정된 모든 국가에 전달되어야 할 사항이었고,비교적 가까운 조선의 경우 금방 보낼 수 있었지만, 유럽과mtw31082.tistory.com2편은 여기로 조약개정. 그놈의 조약개정.이게 3편이고, 4편에서 끝날지 5편에서 끝날지는 감이 오지 않지만기왕이면 5편에서 끝내는 게 친절한 설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3편의 부제목을 달자면 '오쓰 사건'이겠다.시간을 되돌려 1889년(메이지22) 12월.새로운 내각총리대신에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내정되었고, 구로다 내각이 총사임했으니 장관이 전부 바뀌어야 했다.그렇게 새로운 외무대신에 주영 일본공사를 역임했던 아오키 슈조가 임명되었다. 당시 1회 중의원 총선거를 앞두었기에 ..
일본 최초의 총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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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헌법 제정이 완료되었고, 국가 기관 및 내각에 대한 개편이 완료되었다면 그 다음은 국회의 설립일 것이다.메이지 덴노 역시 이 부분을 인지하고 있었고, 국회 개설을 위한 총선거를 명령하려했는데,오쿠마 시게노부 외무대신이 폭탄테러를 당하고 구로다 내각이 총사임하며 미뤄질 수 밖에 없었다.1889년(메이지22) 말 산조 임시내각을 대체하여 제국외희 개설을 위한 총선거를 위해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내각총리대신에 내정되었다.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누구인가.번벌파 무관 정치인의 상징이고, 정당 없이 의견을 통일시키고자 한 초연주의의 대표자아닌가.즉 3대 총리에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내정되고, 그를 중심으로 총선거를 준비한다는 건 민권파 입장에선 부정적인 소식이었을 것이다. 1880년말 민권파는 이미 정치 참여를 위해 그 준..
조약개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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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조약개정 1이와쿠라 사절단대정봉환과 메이지 덴노의 즉위 사실은 당연히 외교관계가 설정된 모든 국가에 전달되어야 할 사항이었고,비교적 가까운 조선의 경우 금방 보낼 수 있었지만, 유럽과 미국은 멀mtw31082.tistory.com1편 2편의 부제를 붙이자면외국인 법관 임용 문제가 적합할 것이다.외국인 법관을 대심원(대법원)에 들이는 대신 영사재판권을 폐지한다는 것이이노우에 가오루, 오쿠마 시게노부 두 외무대신이 제안한 조약개정안의 핵심이엇고,이는 조약개정교섭이 내부적 요인으로 실패하는 큰 원인이 되었다.1885년(메이지18) 초대 내각인 1차 이토 내각이 출범했다.내각제 출범 직전에도 이미 정부의 대표 역할은 이토 히로부미가 하던 상황이었기에,이토가 내각총리대신에 올랐다고 해서 특별한 인사 교체는 진행되..
헌법을 제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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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홋카이도 개척사와 메이지 14년의 정변홋카이도(北海道). 에도시대까지는 에조치(蝦夷地)라고 불린 곳으로, 아이누인의 땅이다.이곳이 일본의 영토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에도시대부터로,1599년(게이초4) 가키자키 요시히로가 지금mtw31082.tistory.com1882년(메이지15) 메이지 신정부는 헌법 제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메이지 14년의 정변 이후 이와쿠라 도모미는 독일과 일본의 정세가 흡사하다고 판단했고,독일 헌법을 모범으로 일본의 헌법을 제정한다는 방침을 설립했다.이러한 이유로 독일식 입헌군주제 도입의 선두였던 이토 히로부미가 1882년 독일로 파견되어1년여간 독일 헌법의 이론과 운용을 수학했고,1883년(메이지16) 귀국한 이토를 중심으로 헌법 제정을 위한 기관인 제도취조국이 설립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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