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료마와 삿쵸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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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이전
좌막파에 비교했을 때 도막파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중심을 잡아줄 인물의 부재였다.좌막파에는 신센구미와 교토 미마와리구미를 지원하고 지지했던 아이즈번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막부와 조정을 중개하며 주요 정책을 결정하고 주도했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그 누구보다 막부 수호의 의지는 강했던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 등이 있었던 반면,도막파는 안세이 대옥과 덴구토의 난으로 미토번이 좌막파로 전향했고,난벽 다이묘 시마즈 나리아키라 사후 사쓰마번은 공무합체론의 선봉처럼 활동했다.도사번은 번 내 여론이 좌막과 도막으로 양분되어 이에 따른 혼란도 있었고,조슈번은 결국 조정의 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도막파의 승리로 이어지기에도막파의 중심 역할을 해준 그 인물을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잠시 인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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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에 따라 시간 순서가 왔다갔다 하는 개판인 분큐와 겐지 연간을 지나드디어 일세일원제 이전 마지막 연호인 게이오에 들어섰다.남은 건 삿쵸동맹과 사쓰도맹약, 2차 조슈 정벌, 삿쵸는 영국-막부는 프랑스와 손을 잡는 정세,그리고 대정봉환에 대한 설명뿐이다.그 다음부터는 이제 메이지이다. 이 부분으로 넘어가기 전에, 앞으로 줄곧 다뤄야하지만 설명이 미흡했던 인물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여기 언급되는 인물은 사카모토 료마와 대정봉환을 언급함에 있어 빠져서는 안되는 인물이다. 우선 사쓰마이다.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사쓰마번사로 막말 사쓰마 번정을 관할한 존황양이파 인사이다.존왕양이파이기에 유배도 다니고 실각도 하고 고생했지만그가 없이 사쓰마번은 설명이 되지 못한다.사쓰마번의 중신이었기에 사쓰마번과 관련된 주요..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와 공무합체론의 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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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간을 돌려 분큐 연간으로 돌아가보자.조슈는 조슈대로, 사쓰마는 사쓰마대로 꼬장을 부리고 있고,젊은 고메이 덴노는 막부를 자기 손으로 부리려 하고 있고,젊은 이에모치 쇼군은 조정을 자신과 막부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에만 쓰고 있다.그 와중에 천주사건은 끊이지 않고, 조정은 좌막파와 도막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막부의 중신으로 일하며 조정과 막부 사이를 중개하던 인물이 누구였냐?바로 쇼군 후계자로도 언급되었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이다.1862년(분큐2) 고메이 덴노는 자신의 위엄을 알리고, 이를 기반으로 막부를 이용해 전쟁할 생각뿐이었으며,이에 대해 조정 내의 존황양이파는 큰 불만을 가졌다.결국 산조 사네토미와 아네가토시 긴사토는 양위를 건백했고,이건 당연히 고메이 덴노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
막말의 조슈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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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슈 최서단의 번 나가토(長門), 지금의 야마구치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편의상의 명칭인 조슈(長州)라는 이름으로 보통 불렸다.다이묘 가문은 이쓰쿠시마 전투 이후 주고쿠의 패자가 되었던 모리 가문이다.모리 데루모토는 노부나가 포위망의 일원이었고, 무로마치 막부가 축출되자 요시아키 쇼군을 보호했으며,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에도 2인자의 자리를 명확히 지켰다.세키가하라 전투에 서군으로 참여해야 했던 탓에 이후 영지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으며,그 대신 나가토국의 다이묘로 생존하게 된다.중앙과는 거리를 좀 두었고, 요시다 쇼인 등 유능한 인사들을 기반으로 번정을 운영했다.그리고 요시다 쇼인 사후에는 쇼인에게 수학했던가츠라 고고로(기도 다카요시),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그리고 ..
막말의 사쓰마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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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쓰마(薩摩). 에도에서 가장 먼 번으로 지금의 가고시마현 일대를 의미한다.이 지역의 다이묘 가문은 시마즈(島津)이며가마쿠라 막부때 휴우가(지금의 미야자키현), 사쓰마, 오스미 제도를 관할하는 슈고에 임명되어에도시대까지 사쓰마번주를 유지했다. 전국시대 말에는 다른 다이묘 가문은 형제끼리 싸우고 부자 간에 하극상이 일어나는 개판인 와중에도시마즈 가문은 똑똑한 아들 넷이 사이도 좋고 능력도 좋아,이를 기반으로 규슈 남부 전 지역을 넘어 규슈의 패자를 넘보기도 했다.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개입하면서 규슈 통일에 실패했고, 결국 도요토미에게 항복하였다.임진왜란의 노량해전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두차례의 전진철수를 감행한시마즈 요시히로가 바로 대표적인 사쓰마번주라고 할 수 있다. 전진철수로 인해 부상을 입은 이..
양이와 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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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양이에 미친 젊은 덴노가 있습니다.과연 양이에 미친 건 이 사람뿐이었을까요? 1862년(만엔2) 미국 공사관의 통역관으로 일하던 헨리 휴스켄이 사쓰마번사에 의해 암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자국민이 피해를 입은 것이니 미국은 항의하고, 결국 막부는 배상하는이런 식의 일이 상당히 비일비재했다. 여기서 개념어를 하나 소개하자면막말유신기부터 2차대전기까지의 암살사건들에 대해 보통 암살이 아닌,천주(天誅てんちゅう)라고 표현하곤 한다.'하늘의 뜻(天)에 따라 벌 준다(誅)'는 뜻으로 천벌과 같은 뜻의 단어이다. 암살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합리화를 곁들인 보통 낭인들에 의해 자행되었는데, 전통시대 일본은 다른 번 혹은 국으로 이동하려면 번의 허가가 필요했고,불순한 의도가 섞였으면 정치적 이유로 통행을 보증..
안세이 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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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히코네번의 후다이 다이묘이며, 그의 조상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붉은 귀신 이이 나오마사이다.히코네번의 번정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요시다 쇼인으로부터 '비할 데 없는 명군'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이후 에도로 와서 우라가 수비를 담당했다.흑선사건을 목격하자마자 그간의 쇄국론을 포기하고 개국론을 펼치기 시작했으며,아베 마사히로 중심의 막정에 있어 외교 방면에서 활동하게 되었다.겸사겸사 아베 마사히로, 홋타 마사요시 등과 함께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후계자로 옹립하며난키파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안세이 5개국 조약이 난키파의 주도 하에 체결되었고, 히토츠바시파 다이묘들이 이에 불만을 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정치적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문제는 안세이 5개국 조약에 대해 고메이 덴노가..
안세이 5개국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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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이(安政)전국이 대지진으로 고통받고, 교토의 화재로 교토 고쇼의 일부가 소실되었으며,흑선사건, 이에요시 쇼군의 죽음과 병약한 이에사다 쇼군의 즉위, 막부 재정 문제 등 다양한 문제가 난립한 시기에이 모든 게 해결되길 바라는 그 마음이 잘 전해지는 연호이다.하지만 그 어떤 것도 해결되지 못한, 격변의 시기이기도 했다. 미일화친조약의 체결에 대해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은 미토번주이자 막부해군을 관하던 쇄국파의 대표마쓰다이라 나리아키(松平斉昭)였다.당연히 당시 개국이라는 선택을 주도하고, 지지했던 아베 마사히로, 홋타 마사요시, 이이 나오스케 등과당연하게도 갈등을 보였다. 이에요시 쇼군의 죽음과 이에사다 쇼군의 즉위로, 이제 차기 쇼군이 될 후계자를 누구로 하냐는 것이 쟁점으로 떠올랐다.이에사다 쇼군은 당연..
존황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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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페리에 의한 개국사실 당시 일본은 이를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네덜란드 상관이 페리의 출항 사실을 전달해줬기 때문도 있지만, 굳이 그게 아니여도주체가 영국이 되었건, 미국이 되었건, 프랑스가 되었건, 러시아가 되었건, 네덜란드가 되었건,이양선이 일본 해안에 잊을만 하면 출몰하는 시국에서 정확한 일지는 몰라도 흑선사건이 발생할 건 충분히 예견 가능했다.게다가 이게 뭐 단기간에 있던 것도 아니고, 레자노프 사건이 1804년(분카1)이니, 대충 50년은 있다고 봐도 충분하다. 근데 왜 대비를 못했냐? 왜 막상 페리가 내항했을 때 아무 것도 못할 수 밖에 없었냐?이유는 간단하다. 주구장창 이야기하지만 50년 내내에도 막부가 돈이 없었다.구미 세계의 접근을 막기 위한 대비책의 필요성은 실감했지만, 이게 당장..
흑선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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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이 6년 6월 3일(양력 1853년 7월 8일)일본을 개국하라는 명령을 받은 군함 네척이 대서양과 인도양을 건너 우라가(도쿄만)에 당도했다.미국의 필모어 대통령은 매튜 페리 제독에게 일본의 개국을 명령했고,필요시 무력행동까지 허가받았으며, 류큐와 오가사와라는 영토로 확보해도 된다는 허락까지 받게 된다.네 척의 배가 마카오에 도달하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나가사키 봉행에 서신을 보냈고,그 덕에 놀라워하고 불안해한 민중과 달리 에도 막부는 태연하게 대처했다.다만 그렇다고 해서 막부가 무얼 한 것은 아니었다.구미세계와 동아시아의 격차는 단기간에 좁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좁힐 수 있다해도 당시 막부에게는 그럴 돈이 없었다.막부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도쿠가와 이에요시 쇼군이 병상에 있어 국사를 논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