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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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내각제 개편과 제헌을 앞두고 같은 시기에 일어난 일을 가지고 하나하나 글을 써오니참으로 지루하고 따분했다.하지만 이걸 마지막으로 드디어 내각제 체제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이제 반 왔다!  공의여론과 서남전쟁정한론 논쟁 이후 낙향한 정한파들은 전반적으로 오쿠보 정권과 메이지 신정부에 대해 부정적이었다.조선 정벌이라는 주제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에 불만족스러웠을 수도 있고,사족mtw31082.tistory.com1871년(메이지4) 진행된 신분해방령으로 인해무사, 귀족, 농민, 상인 등의 직업 기반의 계급은 분명 법적으로 철폐되었다.하지만 메이지 신정부가 원하는대로 정책을 전개하며 몰락하는 계층이 발생했고,그들의 의견은 무시된 차별적 정책 집행이 진행되니,어쩌면..
메이지 시대의 일본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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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나는 공익 나왔고, 군사학에 대한 것이나 전쟁사는 관심이 없다.그렇기에 편제, 전술, 무기 등에 대한 건 최대한 배제하고 서술하도록 하겠다.군대 이야기를 하는데 정치, 외교, 경제, 사회적 이야기에 집중한다는 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지만,그걸 말이 되게 했기에 일본이 2차대전에서 진 거다. 1869년(메이지2) 병부성이 설치되었고,막부가 조정의 사병이라는 형태의 군사제도가 대신 '조정의 군대' 혹은 '정부의 군대'로 개편되었다.이후 1872년(메이지5)년 병부성을 폐지하고 육군성과 해군성으로 분화시켰으며,1873년(메이지6)에는 전국민 징병제가 실시되었다. 일본 육군은 다카스기 신사쿠가 설립한 조슈번의 기헤이타이, 그리고 게이오 개혁으로 만들어진 막부육군에서 기초했다.막부육군은 보신전쟁에서 졌으니 기헤이..
조약개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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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이와쿠라 사절단대정봉환과 메이지 덴노의 즉위 사실은 당연히 외교관계가 설정된 모든 국가에 전달되어야 할 사항이었고,비교적 가까운 조선의 경우 금방 보낼 수 있었지만, 유럽과 미국은 멀기에 일본은 대mtw31082.tistory.com정부 중역을 미국에 보내 조약개정교섭을 진행했지만윗 글에 나오듯 이와쿠라 사절단의 조약개정교섭은 성과 없이 실패했다. 1873년(메이지6) 정한론 정변으로 국내잔류파인 외무경 소에지마 다네오미가 낙향했고,새로운 외무경에 데라지마 무네노리가 취임했다.데라지마는 조선문제와 대만출병 등 다른 외교문제가 해결된 후 본격적으로 조약개정교섭을 시작했다. 수많은 불평등조약 문제 중 데라지마가 우선 집중한 것은 바로 관세에 대한 것이었다.왜냐하면 당시 대장경을 이끌던 오쿠마 시게노부와 마쓰..
오쿠마재정과 마쓰카타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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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시간을 다시 앞으로 돌려보자.1877년(메이지10) 발생한 서남전쟁은 분명 메이지 신정부가 순조로이 승리한 전쟁이었다.문제는 식산흥업정책과 각종 인프라 및 생산시설 건설에 국가 재정을 들이붙는 상황에서전쟁 비용이 추가로 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국립은행 설립과 기업공채의 남발 등으로 민간에 유통되는 화폐의 양이 과다한 상황이었고,저관세로 인해 무역 수익이 그리 많지 못한 상황에서 세수입원도 애매했다.시중에 도는 화폐의 양을 조절할 방법이 당시 메이지 신정부에게는 존재하지 않았고,이대로면 급작스럽고 과도한 인플레이션의 발생을 눈 뜨고 봐야할 실정이었다.당시 대장경 오쿠마 시게노부는 정부지폐를 수집해 이를 소각하여 시중의 화폐 유통량을 줄이려고 노력했다.그럼에도 식산흥업정책을 줄일 수 없었기에 기업공채를 확장..
메이지 일본과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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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조선 서계 사건과 정한론 정변다섯 차례의 쇄국령으로 일본은 그 어떠한 나라와 교역하지 않는 고립주의 외교노선을 채택했다.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갇혀서 굶어 죽겠다는 심산은 아니었고,그렇기에 총 네가지 사설 무역로mtw31082.tistory.com강화도조약 이야기는 여기로 주도자가 누가 되었건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이 원하는 '정명향도'의 기반이 닦인 것은 분명했다.그렇기에 정부 중역인 구로다 기요타카와 이노우에 가오루를 조선에 보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나는 생각한다.하지만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1876년(메이지9)은 메이지 정부의 입장에서는 조선에 집중하기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사족반란과 낙향한 정한파의 반발, 그리고 여기서 비롯된 자유민권운동까지,게다가 이러고 서남전쟁과 기오이자카의 변으로 일본은 정부 수..
우지 가바네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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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역사 관련
표기법이 궁금하다면 맨밑으로 일본서기를 보면 사람 이름이 기괴한 것을 알 수 있다.소야신매자소아마자숙녜물부수옥대련중심겸자련등등등 일본사에서 성은 총 세가지가 사용되었다.우지(氏), 가바네(姓), 묘지(苗字)우지는 덴노가 하사한 성으로, 주요 가문만이 사용할 수 있는 성이었다.특징이라면 성 뒤에 노(ノ)가 붙는다는 것이다.현대 일본어에서 전치사 '의'에 해당하는 표현이니, '무슨 가문의 누구' 정도로 보면 되겠다.주요 우지에는 불교 공인을 두고 정치싸움을 했던 소가(蘇我)와 모노노베(物部),헤이안시대의 귀족 가문인 후지와라(藤原)와 타치바나(橘),무사 가문이었던 미나모토(源)와 다이라(平) 가문이 있다. 물론 더 있다. 가바네는 관직명이다.고대에는 특정 관직을 가문에서 세습했으며(대표적으로 제사)따라서 관..
류큐 대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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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류큐(流球) 혹은 오키나와(沖繩)규슈 남쪽으로 대만을 향해 늘어진 열도를 의미하며,이곳에는 류큐왕국이라는 국가가 오랜기간 존속했다.나라 크기가 그렇게 크지는 않다보니, 일본과의 경쟁에서 유리하지 못했고,규슈와 가까운 섬들(ex:다네가시마)은 전통시대에 이미 일본의 번이 설치된 상태였다. 1602년(게이초7) 류큐 선박이 표류해 센다이에 도착했고, 막부는 이들을 구해 류큐로 보내주었다.그런데 류큐는 이에 대한 사은사를 보내지 않았다.동등한 위치의 국가이니 보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듯 한데, 막부는 이에 분노했고,아무튼 이를 명분 삼아 1609년(게이초14) 사쓰마번에 명령해 류큐왕국을 공격했다. 이를 기유왜란이라고 한다.시마즈 요시히로의 역돌격때문에 막부가 까라면 까야했던 사쓰마번은배상금 내느라 돈도 없..
가라후토 치시마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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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아이누중국사서에는 모인(毛人)이라고 나오는데, 털이 그들을 묘사해준다는 점에서 일본인과의 외형적 차이를 유추하게 해준다.실제로 아이누계 남성들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다.이러한 외형적인 면부터 중국 북방계, 한국계, 중국 남방계, 폴리네시아계가 혼합되어 만들어진 지금의 일본인과 차이를 보였고,지금도 아이누는 연해주, 사할린, 쿠릴열도, 홋카이도 일대에 사는(혹은 살았던), 이누이트와 비슷한 민족으로 여겨진다.사회문화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누만의 전통과 문화가 분명했다.다르게 말하자면,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아이누는 분명 '야마토 민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과 달리 중앙집권적 왕국을 구성하지 못했고, 일본과의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고 말았다.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라는 명칭부터 원래 도호쿠 지방에 살던..
홋카이도 개척사와 메이지 14년의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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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홋카이도(北海道). 에도시대까지는 에조치(蝦夷地)라고 불린 곳으로, 아이누인의 땅이다.이곳이 일본의 영토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에도시대부터로,1599년(게이초4) 가키자키 요시히로가 지금의 하코다테에 마쓰마에번을 설치하고 성을 마쓰마에로 바꾸면서부터였다.이후 러시아의 남하를 대비해 막부직할령이 되기도 했고,러시아와의 영토분쟁을 대비해 홋카이도를 넘어 가라후토(사할린), 치시마(쿠릴열도)까지 탐험과 측량을 진행하기도 했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일본영토였다기 보다는,일본의 권한 하에 있는 아이누인의 땅에 가까웠다.일본영토로 완전히 편입된 계기는 하코다테 전쟁으로,보신전쟁 말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에조 공화국을 설립했고, 이후 신정부군에게 항복하며 완전한 일본영토가 되었다.에조치가 아닌 고키시치도의 권역..
자유민권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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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메이지
공의여론과 서남전쟁정한론 논쟁 이후 낙향한 정한파들은 전반적으로 오쿠보 정권과 메이지 신정부에 대해 부정적이었다.조선 정벌이라는 주제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에 불만족스러웠을 수도 있고,사족mtw31082.tistory.com  조슈삼걸의 시대대략 일년여의 시간 동안 메이지 유신을 이끈 세명의 인걸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가 모두 명을 달리했다.이와쿠라 도모미와 산조 사네토미를 제외하면, 소위 '유신의mtw31082.tistory.com이 두 글에서 이어집니다. 유신삼걸이 죽은 후 정권은 이토 히로부미와 오쿠마 시게노부를 중심으로 개편되었다.이토는 문관관료들과 교류하며 조슈번 출신 정치인들의 지지를 받던 인물이었고,오쿠마는 대장성에서 활동하며 메이지 초기의 국가재정을 정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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